마도로스 양선장 형님! 편히 쉬세요~

2014. 9. 10. 23:02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지난 9월 5일, 천국으로 떠나신 분의 이야기입니다.

제 20대의 마지막 시절에 축구를 인연으로 만났고, 저뿐만 아니라 축구를 좋아하던 제 또래의 무리들에게 많은 영감과 즐거움을 주셨고, 또한 주변의 많은 지인들에게 축구의 열정을 주셨던 귀한 분이십니다.


공교롭게도 부천에서 한국:베네수엘라 A매치가 열리는 날 떠나셨습니다.

생전에 부천 팀 사랑하셨고 많이 응원하셨는데 말입니다.

건강히 계셨다면 그날 경기장에서 만나 싱거운 농담도 주고 받으면서 재밌게 경기 봤을텐데 말이죠.


장례식장에서 형님과 함께 경기 봤습니다.^^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 예의인 장례식장이지만... 생전에 워낙 축구를 좋아하셨던 분이니 축구 소식 궁금하셨을 것 같기도 하고, 옆에서 같이 보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랬네요...

장례식장에서 만난 지인들 중 한 분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평소에 축구 좋아하셨던 형님이 단관(단체관람) 자리 만들어 주고 가시네..."


아래는 제가 2002년에 붉은악마 웹진에 올렸던 고인에 대한 이야기, 축구를 몹시 사랑했던 한 싸나이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느꼈던 고인의 축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축구로 인해 즐거웠던 그분의 인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도로스 양선장 형님!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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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로스 양선장


양광성(楊光成). 1959년생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싸나이, 마도로스! 뭔가 낭만이 느껴지고 멋과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때로는 바다 한 가운데서 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여유를 느끼고… 여기에 축구를 좋아 하는 사람이라면 암스테르담, 리오데자네이로, 나폴리 같은 멋진 도시에서 멋진 축구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덤으로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에 한 두번도 기회가 올까말까한 해외 여행의 기회를 밥 먹듯이 가질 수 있고, 세계의 유명 항구를 내집 드나들듯이 드나들고, 보통 사람들이 TV를 통해서나 볼 수 있는 해외 리그의 멋진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물론, 당신이 축구를 정말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나폴리의 해변보다 마라도나를 먼저 떠올리고 암스테르담의 풍차보다 아약스가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바다를 통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축구를 가슴에 품어 볼만 할 것 같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런 행복에 겨운 멋진 삶을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면,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선원이라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바로 이번에 소개할 양광성님을 통해서 대양을 누비는 붉은악마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지난 6월 29일 터키와의 월드컵 3-4위전을 보러 가는 서울발 단관버스 안에서 양광성님이 풀어 놓은 20년간의 이야기는 ‘바다’, 그리고 ‘축구’ 였다.


아… 부러워 미치겠다!


“82년부터 지금까지 쭉 배를 탔어. (헉! 20년이랜다!) 세어 보지는 않았는데, 셀 수도 없고… 한 70개국이 넘을거야. 그 안에 유명한 클럽들이 있는 도시는 대부분 들어가고. 딱 두 군데가 아쉬워. 포루투갈의 벤피카하고 독일의 뮌헨! 세계적인 명문 클럽은 다 봤는데, 이상하게 벤피카는 입항 할 때마다 경기 일정이 맞지 않더라고. 뮌헨은 또 독일 내륙에 깊숙한 곳이고… 그게 제일 아쉬워.”


이거… 이야기 하는 폼이… 결국은 벤피카랑 바이에른 뮌헨 말고는 세계 유명 클럽 경기는 다 보았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이런 꿈만 꿔도 행복할텐데 양광성님은 그 둘만 보지 못해서 아쉬워 죽겠다고 한다. 약간, 아니 상당히 많이 샘이 나기 시작했다. 이야기 시작부터 이렇게 기선이 제압되어 버리다니…


“리버풀이랑 바르셀로나가 제일 인상에 남는데… 내 기억에 리버풀 관중들의 열기가 제일 뜨거웠던 것 같아. 선수랑 관중이 거의 구별이 없고, ‘이게 진짜 홈이구나!’하는 느낌이 정말 강하게 남아있어.”


“바르셀로나는 경기를 워낙 힘들게 보기도 했고, 또 유명 선수들이 한참 많을 때였어. 스토이치코프, 살리나스, 고이코아체아가 같이 뛰던 때가 있었는데… 감독은 요한 크루이프였고.

그쪽은 경기 당일날 현장에서 표 산다는 것은 바보 짓이나 마찬가지야. 좌석이 6만석이면 벌써 몇만석은 연간권으로 다 팔리는 식이라고. 그 때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암표 알아보고 해서 골대 뒤 3등석으로 맨 꼭대기 자리에서 봤다고.”


우려했던(?)일이 바로 튀어 나온다. 우리가 가끔씩 TV를 통해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리버풀이나 바르셀로나의 경기, 그곳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과 열기, 스타 플레이어들의 눈부신 모습을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보았다니! TV로 보던 바로 그 곧에 있었다니… 이건 부럽다 못해 배까지 솔솔 아파오기 시작한다.


“좋은 선수들 많이 봤어. 지금 친구들은 잘 기억하지 못할거야. 캐빈 키건이나 루디 푈러 같은 선수들 참 좋았지. (루디 푈러는 이번 한일 월드컵의 독일팀 감독을 말한다.)  캐나다에서는 우연찮게 피터 비어슬리를 만나기도 했지. 그리고, 차범근이 독일 가기 전에 오쿠테라라고 일본 사람이 독일에서 뛰었다고. 루디 푈러랑 같이 뛰었는데… 나는 뭐 그때만 해도 해외 축구는 잘 몰랐고 오쿠테라만 알았지. 사실, 오쿠테라를 한 번 볼려고 경기장에 간거지 뭐. 그때가 1983년인가 그런데…”


“캐빈 키건 같은 경우에는 당시에 최고의 선수였지. 내가 본 건 캐빈 키건이 뉴캐슬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낼 때였어.  세인트 제임스 파크라고 뉴캐슬 홈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상대팀이 브레멘이었지. 루디 푈러가 막 뜨기 시작하던 때였다고. 그 시즌에 분데스리가 득점왕 먹고 그랬으니까.”


그 때만 해도 경기가 끝나면 유럽에서도 관중들이 경기장으로 막 뛰어 들어가고 그랬다고 한다. 물론 지금 영국 경기장에 가보면 관중석 앞쪽에 셰퍼드가 딱 버티고 있어서 경기장에 뛰어 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_^ 


뉴캐슬 홈 구장인 세인트 제임스 파그에서 경기가 있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선수들 쪽으로 뛰어 갔다고 한다. 그 때 양광성님 또한 혈기 왕성할 때였으니… 분위기 대충 파악하고, 용기를 탈탈 털어서… 덩달아서 뛰어 들어갔다고 한다. 내친김에 아예 라커룸까지 성공적으로 잠입(?)을 했는데… (여러분, 이러면 안됩니다. ^_^) 


“라커룸에서 캐빈 키건을 본거야! 싸인 해 달라고 하고, 사진 한 번 찍자고 하니까 흔쾌히 찍어주더라고. 본인도 놀랬겠지. 왠 동양인 청년이 찾아 왔으니…

그 사진이 내 보물이 됐어. 항상 가지고 다녀. 사진 덕도 많이 봤다고. 워낙 유명한 선수니까… 유럽에서 외국 축구팬들 만나서 그 사진 보여주면 대접이 달라진다구. ‘너 진짜 축구 좋아하는구나!’, ‘너 참 대단하다, 부럽다’ 동양인이라서 인상이 훨씬 강하잖아? 심지어 자기가 그 동안 모은 캐빈 키건 골렉션을 나한테 그냥 줄 정도니까.”



케빈 키건과 라커룸에서




“베베토도 아주 어릴 때 봤어. 1985년이던가? 부두 노동자들이 스트라이크를 하는 바람에 리오데자네이로에서 배가 한 달 정도 묶였거든. 말라카냥 경기장에 플라멩고 경기를 보러 갔는데… 조그맣고 어린 놈이 공을 무지 잘차는거야. 관중들도 그 놈이 공 잡으면 난리가 났지. 그 사람들 표현이, ‘브라질 축구의 미래는 베베토다!’ 그랬다고. 그 때 베베토가 한 20살쯤 됐을거야.”


리오데자네이로 한 번 가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플라멩고건 산토스건, 아니면 플루미넨세나 바스코다가마. 어느 한 팀 경기라도 직접 볼 수만 있으면 좋겠다. 베베토가 뛰는 것을 직접 내 눈으로 한 번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마도로스가 될까나?


자꾸만 부러움이 밀려온다. 이 글을 읽은 당신들도 열라게 부럽지? 우리 다 때려치고 배를 탈까? 그래, 함 물어나 보자. 어떻게 하면 양광성님처럼 세계 곳곳의 유명 경기장을 누비며, 유명 팀과 선수들의 경기를 볼 수 있는 바다 싸나이가 될 수 있는지!


“하하. 선원들이나 상사 주재원, 외교관들이 다 축구 보는 것은 아니야. 나 같은 직업은 많지. 이 기회에 꼭 이야기 하고 싶은게 있는데, 우리 선원들이 항구에 도착해서 술 마시고 관광하고 노는거 말고 축구 경기 많이 봤으면 좋겠어. ^_^ ”


“배낭여행 하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유럽 같은 경우는 축구장가서 그 팀 경기 보는것처럼 좋은 문화관광이 없다구. 유명한 성당이나 유적지만이 문화가 아니야. 그건 옛날에 살았던 거를 보는 것이고, 축구장은 또 다른 현재의 문화거든. 그게 진짜 생활이고 문화란 말이야.”


“해외 나가거든 될 수 있으면 돈이 좀 들더라도 1등석이나 2등석에서 보는게 좋아. 3등석에는 서포터스가 있잖아? 근데, 걔네들 우리랑은 질적으로 틀려. 양아치나 훌리건들도 많이 섞여 있고, 행동도 굉장히 거칠어. 자기들끼리도 싸움 많이 하는데, 특히나 동양인 같이 이방인 티가 확 나는 경우에는 괜히 시비를 걸기도 한다고. 나도 3등석에서 보다가 낭패를 볼 뻔 했고…”


아니요… 아저씨, 어떻게 하면 바다 싸나이가 될 수 있냐고요… 혹시 힘들지는 않는지,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 수입은 좀  짭짤한지… 그게 궁금하다고요!


“난 해양대학교 78학번이야. 82년부터 배를 탔고, 91년에 선장이 됐으니까 9년쯤 걸린거지. 해양대학교 졸업하고 처음 배를 타면 3항사(3등 항해사)로 일을 시작해서 한 10년쯤 되면 선장이 될 수 있어.”


그렇다면, 지금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 중에 해양대학교로 진학해서 대략 10년 이상 바다에서 개기면 아저씨처럼 세계를 누비며 축구와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김선장, 박선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한국해양대학교(부산)와 목표해양대학교가 있다고 한다.)


“바다는 좀… 자기 체질하고 맞아야 돼. 10년 못 견디고 다른 직업을 찾거나 육상근무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나처럼 끝까지, 선장까지 가는 사람이 10% 정도밖에 안돼.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거야.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 된다고. 젊을 때는 1년에 10개월을 바다에서 사는건데... 가족이랑 친구들과 떨어져서, 그것도 배 위에서 10개월을 사는게 쉽지가 않거든.”


그렇겠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하고, 또한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축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볼 때 마냥 부럽기만 한 것이다. 남을 부러워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축구를 즐길 줄 아는 것이 답인 것 같다.


“수입은 괜찮은 편이야. (^_^) 지금은 선장이기도 하고... 근데, 예전처럼 선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건 아니야. 전에는 선원들이 벌어 들이는 외화가 굉장히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일반 사무원하고는 비교가 안되게 수입이 좋았어. 고생도 굉장히 심했고.

지금은 우리나라가 골고루 발전을 해서 20년전하고는 많이 틀리지. 선장만 해도 옛날에는 별을 보면서 방향 잡고  해안에서는 경험에 의존했는데, 요새는 위성장비랑 통신장비, 계측장비 같은게 굉장히 발전을 했거든. 당연히 힘든 일도 많이 줄었고, 또 탑승하는 사람도 몇 명 안되지.

선장은 연봉으로 계약을 하는데, 타는 배에 따라서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야. 나는 주로 원유선, 가스선, 화물선 같은 큰 운송선을 모는데… 연봉으로 대략 5천에서 9천만원 사이야.”


양광성님 말에 따르면 20년 전에 3등 항해사의 월급이 일반 대기업 사원의 세 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배에서는 먹고 자는 것이 모두 해결되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 배를 타면 제법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선진화되고 하이 테크놀로지 산업이 경제의 축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뱃사람이 목돈을 만지기가 쉽지는 않다고 한다.


“사실 배타는 일이 고독하고 힘들기 때문에 지금도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가장 혈기 왕성한 시기를 바다에서 보낸다는 게 쉬운일이 아니야. 돈은 많이 벌지만 바닷사람 중에 씀씀이가 큰 사람들도 많잖아? 그렇지만, 나처럼 바다 좋아하고 세계 각국의 축구 경기 보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면 정말 괜찮은 직업이지!

우리 아들이 내년이면 고3이 되는데, 이 녀석도 해양대학을 가서 나보다 더 나은 선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는데… 선택을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


그렇다면, 양선장님이 몰고 다니는 배 크기는 얼마나 될까? 운송선은 규모가 무척 크다고 한다. 작게는 1만톤에서 크게는 25만톤이 넘어가는 큰 것도 있다고 한다. (감이 잘 안잡히죠?)

좀 더 쉽게 말한다면 갑판 둘레가 약 1Km쯤 되고 축구장이  두 개나 세 개 정도 들어간다고 한다. 승선 인원은 25명에서 30명 정도. 길게는 몇 개월 동안 항해를 하기도 하며 중간중간에 기항지에 일정기간 머문다고 한다. 이렇게 기항지에 머무는 기간에 쏜살 같이 달려가서 축구 경기를 보곤 했다는 것이다. 역시나, 어지간한 축구팬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축구장을 찾아 다니지도 못할 것 같다. 대양을 누비는 직업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골수 축구팬이었기 때문에 ‘바다’와 ‘축구’를 즐기는 멋진 싸나이가 된 것이 아닐까?


기항지에서 생긴 일


“기항지에서 외국팀하고 축구 경기를 할 때도 있지. 지금은 배도 나오고 이렇지만,  (타는 배가 아니고, 아자씨의 배둘레햄) 그때는 나도 날랐지! (어… 이거 누구나 하는 말인데..)”


“86년에, 그 때 2등 항해사였는데… 뉴욕항에서 영국 군함 대표팀하고 우리나라 상선 대표팀하고 경기한 적이 있다고. 그쪽은 한 300명 됐고 우리는 상선 세 척 합해서 75명쯤 됐지. 미국이 그때만 해도 완전 축구 불모지였지만 시설이나 이런거는 최고였다고. 한 사람당 1달러만 내면 유니폼, 스타킹, 축구화에 심판이랑 잔디구장까지 다 셋업을 해 줬어. 경기 마친 다음에는 양팀의 경기에 대한 인증서(Certification)까지…”


일단, 부럽다! 미국 축구가 비록 여전히 변방의 축구로 인식되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처럼 잘 갖추어진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최강의 여자 대표팀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번 한일 월드컵에서도 훌륭한 경기로 8강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럽다…


“그날 2대2로 비겼어. 나도 한 골 넣었고! (이 정도면 으쓱할만 하지?) 관중도 한 500명이 넘었다고. 그쪽 군인들이랑 우리 선원들이랑 응원도 볼만했고. 진짜 그날은 내가 국가대표 선수가 된 기분이었지!”


맞다! 그게 국가대표다! FIFA가 인정하는 A-매치 대표만 국가대표인가? 그날 그 순간, 국가를 대표해서 뛰면 국가대표지 뭐! 이미 16년전에 한국 대표팀이 잉글랜드 대표팀과 2대2로 비긴적이 있다니! 우하하…


“87년에는 좀 황당한 게임도 있었다고. 멕시코에 만자니요 해변이라고 태평양 연안인데, 동네에 여자팀이 있더라고. 야~ 근데, 여자팀이지만 공을 참 잘 차는거야. 그래서, 우리 선원팀이랑 한 번 시합을 해도 되겠다 싶었지… 뭐, 3대0으로 깨졌지. ‘동네’팀, 그것도 ‘여자’팀한테 말이야….”


나름대로 국가대표팀(?)의 자존심도 좀 상했을 것 같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고 한다. 멕시코 축구가 이정도인가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한 86년 멕시코 월드컵를 치른 뒤였기 때문에 멕시코 전역에서 축구 열기가 어느 때 보다 높았다고 한다.


“터키 축구도 굉장히 좋아. 이번에 4강 오른게 우연이 아니라고. 운이 따르지 않아서 한동안 월드컵에 못나왔을 뿐이지 터키 축구가 유럽 본토하고 비교해서 별 손색이 없어. 1991년이니까 1등 항해사 말년이었는데, 그 때 ‘탄주’라는 선수가 아주 유명했지. 내가 본 경기가 페랄바체랑 베직타시라는 팀의 경기였는데… “


(음.. 팀 이름조차 잘 모르겠다. 공부 좀 하자!)


“경기 수준이 장난이 아니야. 열기도 엄청나고 말이야. 특히, 터키 서포터스는 엄청나게 열광적이고 과격했어. ‘터키 축구가 외부에 알려진것과 달리 굉장히 수준도 높고 열기도 높구나… 좋은 선수들도 많구나…’ 하고 그 때 느꼈어. 이번에 터키가 4강에 올라온 거는 하나도 이상한게 아니야. 우리가 4강에 올라온게 좀 이상한거지. 하하…”


쓰바루… 터키… 진짜 장난 아니었다. 그날 우리도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양선장님은 우리 스스로 한국 축구가 세계 축구의 변방이 아니길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적인 수준의 리그가 곳곳에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무리 초라한 지역 리그 경기라도 예상 외로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고, 선수들의 경기하는 자세나 관중들의 열기는 프레미어 리그나 세리에 A 경기에 뒤질 것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지방 소도시로 갈수록 지역민들의 축구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더 뜨겁고, 선수들의 연대 의식과 직업정신 또한 훨씬 높다고 한다.


“오히려 지금은 예전보다 열기가 좀 약한 편이야. 사실 유럽의 지방 도시들은 축구팀이나 기타 지역의 클럽 외에는 여가 활동도 미비했고 지역을 대표하는 구심점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어린 애들 피아노 학원이나 속셈학원 보내는 것처럼, 태권도장 보내는 것처럼,  유럽 아이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를 하는 거였다고. 그게 과외 활동이고.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도 했고, 또 80년대에 훌리건 문제가 워낙 심각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진짜 축구팬들이 한동안 경기장을 떠나기도 했다고. 이제는 그런 것들이 다 조화롭게 됐지만…”


오랫동안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볼 때는 마냥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우리는 월드컵이 열리면 편안하게 TV를 보기도 하고 직접 월드컵 경기장으로 달려가는 열성 팬들도 있다. 그러나, 배를 타는 사람은 배의 출항 스케쥴이 있기 때문에 월드컵 기간에 꼼짝 없이 바다에 묶이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과연 양선장님이 그래서 월드컵을 보지 못했을까? 흐흐…


“94년 미국 월드컵때 가스선을 몰고 중국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한국하고 스페인 경기가 있었던거야. 입항하려면 이틀이나 남았는데.

미치는거지. 지금은 위성 안테나가 있는데 그 때는 그냥 전파 수신기만 있었거든.

이런 이야기 하면 안되는데 (^_^ ) 그냥 항로를 좀 이탈했지… 베트남 연안으로 배를 잠시 붙이고서 두 시간 동안 경기보고 다시 항로 복귀했어. 내가 선장이니까! ^_^”



(요렇게… ‘이런 이야기 하면 안되는데…’ 라고 말하면, 이야기하면 안된다는 말까지 다 해버리고 싶어진다.) 만약 선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다. 월드컵 경기를 꾹 참고 보지 않기에는 속이 답답해서 미쳐버리지 않았을까?


“86년에는 2등 항해사였는데… 그 때 캐나다 벤쿠버에 들어간 적이 있지. 그런데, 영국하고 캐나다가 친선 경기를 한다는 거야. 경기장 갈려면 한 200km를 가야 하는데, 경기는 보고 싶고 방법은 없고. 그 때는 내가 선장이 아니니까 맘대로 못하잖아? (뭐, 선장이라고 맘대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니란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결국 선장 허가 없이 무단 외출을 했다고. 히치하이크 해 가면서 경기장에 갔는데… 경기 잘 보고 돌아오니까 난리가 난거야. 사람들이 내 생각해서 대충 얼버무렸는데 생중계 화면에 내가 딱 잡힌거야! 골대뒤 관중석에… 1주일간 상륙금지령 받았지 뭐.”


양선장님, 이번 월드컵 기간에는 아예 휴직을 하고 마음 편하게 월드컵을 보기로 했다고 한다. 어린 친구들과 어울려 단관버스 타고 다니면서 하는 여행이 제일 재밌다고 한다. 더구나 한국팀이 승승장구 4강까지 올랐는데, 배타고 다니면서 남의 경기 보는 맛이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을 것이다.


K리그, 그리고 붉은악마!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차고 놀면서 하루를 다 보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매주 월요일 밤에 MBC에서 중계하는 분데스리가 경기를 보면서 축구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나중에 배를 타게 되면서는 직접 축구 문화를 접하게 된거야. 배타는 사람들은  기항지에 딱 들어가면 선술집 같은데 가서 술 한잔 하고 그러거든. 그런데, 이건 온통 축구더라고. 유니폼 입은 손님들이며, 머플러, 응원가… UEFA컵 같은 경기라도 열리면 난리가 나는거지. 그 전까지는 그냥 경기를 보는 재미, 공차는 재미만 알았는데…거기서 축구를 하나의 문화로 접한거지!”


배를 타고 해외로 자주 나가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국내 축구경기를 자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1년에 한두달 있는 휴가나 육상근무 기간에는 거의 전국투어를 하면서 국내 축구경기를 보곤 했다고 한다. 워낙 바다에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이 기회에 전국의 친구들도 만나고 축구도 보고 하면서 휴가를 보낸 셈이다.


“96년부터 육상근무를 좀 하게 됐지. 국내에서 머무는 시간도 많아지고 여가도 좀 더 생기고 그랬겠지? 그 때 주로 목동 경기장에서 구경을 했어. 자연스럽게 부천 경기를 많이 보게 됐고. 그런데, 경기장에서 보니까 구단에서 고용한 응원단 같기도 하고 어설프게 유럽 서포터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친구들이 경기 할 때마다 오더라고. 그러다가 하이텔(PC통신) 축구 동호회를 알게 됐는데… 내가 경기장에서 보던 그 어설픈 친구들이 바로 초창기 붉은악마 원년 멤버들이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본게 서포터스가 맞긴 맞았던거지.

진짜 놀랬지. 신선했고. 난 그래도 유럽에서 서포터스를 많이 봐 왔는데, 어설프건 어쨌건 간에 우리나라에서 그런 친구들을 만났다는게… 허허…”


그것이 붉은악마와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연스럽게 부천 서포터스가 되었고 아빠와 함께 경기장을 찾던 아들도 부천 서포터스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해외의 유명 클럽 경기를 많이 보고, 또 아무리 선진 축구를 가까운 곳에서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의 축구 문화를 옆에서 보고 즐긴 것이었다. 한 팀의 서포터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양광성님 스스로를 ‘축구 문화를 바라보는 사람’에서 ‘축구 문화의 주체’로 바꾸어 준 셈이다. 부천이 바르셀로나 같은 클럽은 아니지만, K-리그가 스페인 리그와 비교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고 열악하지만… 초라한 국내 지방극단의 ‘주인공’과 브로드웨이 유명 뮤지컬을 보는 ‘관객’의 차이랄까? 한 팀의 서포터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전부 친구야. 너(필자를 말함)랑 나랑 열 살 차이지만, 어차피 50 넘어가면 같이 노년을 맞이하는거야. 스무살하고 서른살 때는 나이 차이가 많아 보이지만, 쉰하고 예순하고는 그냥 친구지. (뒷 자리의 스무살 쯤  되어 보이는 학생을 가리키며) 쟤하고 나도 친구야. 안그러냐?”


사실 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양선장님을 알고 지냈기 때문에 편안하게 ‘형’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축구’라는 공통 언어가 있다는 것은 참 즐겁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공통언어와 관심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이나 직업, 출신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누구나 형이고 누나가 될 수 있으니까. 양광성님의 말처럼 앞으로 20년, 30년이 흐른 뒤에 그 날 대구행 단관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모두 친구로 다시 만나는 것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 소박하다면 소박한거고, 사치스럽다면 사치스러운 소원인데… 이 다음에 나이가 더 들어서 은퇴하고 난 다음에 말이야, 세계 어느 곳에서 경기가 열리든 간에 내가 보고 싶은 경기가 있으면 비행기 1등석 타고 날아가서 무궁화 다섯개짜리 특급호텔에서 잠자고 경기장 1등석에 앉아서 경기를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축구팬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가장 호사스러운, 그리고 꿈이라도 한 번 꿔 보고 싶은 소원이 아닌가 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일이 가능한 부자나 VIP들도 많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축구를 사랑하고 늘 축구장 곁에 있기 때문에 양선장님의 소원 역시 축구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양광성님의 소중한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형님 뒤에... 엄숙하지 못한 두 놈. 자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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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넉넉한 웃음... 즐거웠던 축구 이야기... 모두 그리울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