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위기를 보고 있자니 대표팀이 떠오르네요.

2011. 8. 25. 13:33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포항 팬의 입장에서 볼 때, 어제(8월 24일) 성남과 포항의 FA컵 4강전 경기는 승패를 떠나서 매우 쪽팔린 경기였습니다. 진 것도 아쉽지만... 경기 자체가 전혀 포항답지 못한 내용이었지요.
(더 심하게는... K리그 팀 답지 못한!)
성남이 세 골이나 넣었지만, 세 골 모두 환상적인 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여기에는 포항의 책임도 있습니다.
경기의 품질이 높아야 골 장면도 멋진 그림이 나오니까요.

사실 지난 전북과의 K리그 22라운드  경기에서도 우려되는 모습은 나타났습니다.
1, 2위의 대결답게 내용 면에서는 괜찮았던 경기였는데...
포항의 의도대로, 포항의 리듬으로 경기가 흘러가지 않을 때는 아주 평범한 상황에서 허무하게 실점을 하는문제가 하나고, 또 하나는 경기의 분수령이 되는 시점에서 상대에게 한 방 먹으면 급격하게 팀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상대팀 입장에서는, 특히 득점력이 있는 팀일 경우에는 승부처에서 확실하게 선제 득점을 올릴 경우 비교적 포항을 격침시키기가 수월해 지겠지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우선, 포항 선수들의 성급함이 보입니다.
경기 초반, 포항 특유의 스피디한 패싱 플레이가 전개될 때는 정말 나무랄데 없이 좋은 모습으로 경기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월하게 경기를 지배하는 순간 포항 선수들은 다소 성급해 지는 것 같습니다.
쉽게 풀리니까 자기도 모르게 달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지나친 자심감 내지는 빨리 승리를 결정짓고 싶은 성급함이랄까?
선수들 스스로가 아는거죠.
"우리는 먼저 실점하면 끌려간다... 빨리 선제득점을 올리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경기의 리듬이 깨졌을 때 좀처럼 이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실점을 당하면... "우쒸...오늘 힘들게 가겠네..."라는 압박이 팀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현재로서는 이게 제일 큰 문제인데...
상대방에게 먼저 실점하고 끌려가는 상황, 상대팀이 의도적으로 포항의 템포를 깨는 지연전술이나 뻥축구 전술을 구사하는 경우, 후반 중반 이후 양팀 모두 체력이 떨어지는 시점 등...
조금더 끈기 있게, 승리에 대한 자신감, 차분한 집중, 자기 축구에 대한 확신과 뚝심이 필요하겠네요.

감독의 전술적인 판단도 중요합니다.
가령, 어제 노병준의 선발출장은 결과적으로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병준은 스스로가 '플러스 1'인 상황일 때 진가가 나옵니다.
'플러스 1'인 상황... 예를 들어, 1명의 포워드에서 2명으로 늘어나는 상황, 3명의 공격수에서 4명으로 늘어나는 상황, 상대팀 수비에 마이너스 요소가 생긴 상황, 체력이 떨어진 후반 중반 이후에 투입된 상황 등등이 되겠지요.
노병준은 이런 상황에서 탁월한... 전형적인, 최고의 조우커지요.
초반의 밀고 당기고 부딪치는 상황부터 투입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좋은 카드는 뒤에 남겨 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마도... 뒤에 슈바를 대기시켜 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노병준을 초반에 투입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

자, 그러면!
우리 대표팀을 한 번 볼까요?

포항을 말할 때 최고의 미드필드진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지만, 포항의 진짜 장점은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전 선수가 그런 세밀한 플레이로 엮여서 돌아간다는 것!
바로 조광래 감독이 구사하는 짧고 긴밀한, 수준있는 패싱 축구.
여기에 가장 근접한 K리그 팀이 바로 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수 구성의 완성도는 대표팀이 좋을지 몰라도, 팀의 완성도는 오히려 포항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현재 포항이 보여주는 문제점들을 대표팀에서도 타산지석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원하는 패싱 게임이 풀리지 않았을 때 팀 밸런스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
경기 내용이 득점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고유의 패싱 플레이가 실종되면서 성급해 진다는 점.
한 번 기세가 꺽이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의 황홀한 패싱 플레이에 몰입되어서 그게 경기의 전부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 경기 결과는 아쉽지만 내용은 만족한다는... 패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좋은 수단. ^_^)

현재의 대표팀이나 포항의 공통점은 선수 개개인의 특징에 의존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팀 밸런스에 의해 강점을 갖는다는 것일텐데... 분명히 장점도 많겠지만...
팀 밸런스에 균열이 생기면 정말 죽도 밥도 아닌, 대책 없는 축구가 되어 버리기도합니다.

일말의 흔들림 없이 강도 높고 완성도 높은 팀 플레이를 90분 내내 제대로 펼치던가,
선수들 하나하나의 가슴에 조광래 축구에 대한 이해와 자신감과 확신이 철철 넘치던가,
그게 아니라면 그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예비 전술과 반전카드(교체선수)가 준비되어 있어야겠지요.

박지성과 이영표의 공백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대표팀의 문제...
결국, 박지성과 이영표의 가장 큰 역량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완성되지 못한 팀 축구의 일부를 선수 개인의 경험과 기량, 정신적 우월함으로 채워주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지금 포항이 겪고 있는 위기의 양상은 대표팀에도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대표팀 입장에서는 지금이 그런 위기의 시기일 수도 있고요.
(저는... 위기의 시기로 보이네요. T.T)

대표팀에 박지성과 이영표가 다시 나타난다거나
포항이 데얀이나 이동국, 샤샤 같은 선수들 데려온다면 모를까...
조광래 감독도 황선홍 감독도...
아직 그런 축구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단계이기도 하겠지만
완성되지 못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제2의 답은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FC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이 조광래 축구의 롤 모델쯤 되겠지요?
하지만, 전교 1등하는 옆반 아무개만 따라가면서 공부한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지요.
내 옆에서 나와 엎치락 뒤치락 하는 우리반 친구의 모습이 더 좋은 자극과 동기를 줄 때도 있습니다.

포항이 지금 맞고 있는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실제로 어떻게 해결해 나아가는지, 만약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문제는 무엇인지...
대표팀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PS) 포항 스틸러스, 정신 빠싹 차려야 내년에 국제선 비행기 탈 수 있다!
근데, 한 게임 말아 먹었다고 머리 쳐박고 다니지는 말자!
머리 꼿꼿하게 쳐들고, 눈 부릅뜨고, 정신무장 단디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