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기는 처음일세...

2009. 12. 16. 12:30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포항과 에스투디안테스의 FIFA 클럽 월드컵 4강전은
제가 지금까지 거의 20년 가깝게 보아 온 포항 스틸러스의 경기중에서
최악의 경기 2위에 랭크될만한 경기네요. ^^

1위는 2006년 포항과 수원의 경기입니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
당시 수원 벤치의 실수로 외국인 선수 4명이 필드에 나서는 해프닝이 발생했고
경기는 그 자리에서 끝, 포항의 3대0 몰수승으로 끝났습니다.
경기보러 같다가 헛탕 때리고, 기분 더럽게 승점 따낸 경기였지요. ^^

...

오늘(12/16) 새벽에 있었던 경기...
심판판정 같은 문제를 떠나서, 클럽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 나서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프로팀들도 좀 더 다양한 국제 경험이 필요할 듯 합니다.
마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맞붙던 상황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도 못한 채
뒷끝 진하게 경기를 치르고 말았네요.

얼음~ 땡!
전반 초반... 포항은 완전히 얼음~ 땡 놀이를 했습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모습. 아르헨티나 클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전반 중반이 넘어서면서 서서히 미드필드 싸움이 시작될만큼
포항은 "얼음" 주문에 걸려 있었지요.
하지만 재밌게도... 에스투디안테스 또한 매우 조심스럽게 경기를 했습니다.
컨디션이 매우 안좋아 보였고, 체력적인 문제도 있어 보였습니다.
그들도 포항 스틸러스를 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돌이켜볼수록 아쉽습니다.
이번 경기에 나선 에스투디안테스는 결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상대였던
알 이티하드 보다 덜 위협적이었습니다.

신화용, 특히 얼음~땡!
골키퍼가 얼음~땡에 걸린 것은 치명적입니다.
다른 선수들도 얼음 주문에 걸렸지만, 골키퍼에 비해서 덜 치명적이지요.
몇 차례의 위기 상황, 석연찮은 첫실점, 그리고 두번째 실점과 퇴장장면까지...
얼음~땡에 걸리지만 않았으면 골키퍼의 사정권 안에서 처리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신화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포항 선수들... 어느날 갑자기 지금까지 자기가 뛰었던 축구경기 중에서
가장 큰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우리에겐 너무 가혹했던 심판
심판의 오심이나 편파판정을 논하기에 앞서서...
심판의 성향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 불리했습니다.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는 터프하게 임할 수 밖에 없지요.
이런 판국에 카드 사랑 휘슬사랑 심판이 경기를 맡게 되었으니...
포항으로서는 경기 운영 전략 자체가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심판들의 자질도 좀 의심스럽습니다.
첫 골 상황은 근소하긴 했지만 오프사이드가 맞았고
데닐손의 만회골 상황은 명백한 오프사이드였으니까요.
운영의 묘가 아쉽습니다.
박진감 넘치는, 의외성으로 인해 경기에 긴장감이 더해지고
스피디한 전개와 거친 몸싸움 속에서도 한 칼의 세련된 골이 터지는...
아름다운 축구경기를 조율해 내지 못했습니다.
포항과 에스투디안테스가 만들어낸 세 골 모두 환호를 받을 수 없었고
승자도 패자도 기분 찜지름한 경기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우리나라 선수들의 수비자세입니다.
심판이 휘슬을 불기 전에 먼저 판단을 하고 플레이를 멈춰 버리는 나쁜 습관...
물론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심판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겠지만
이번 경기처럼 아주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실점을 허용할 수도 있습니다.
K-리그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우리나라 선수들 특유의 몸에 밴 습관인 듯!

허정무는 웃고 있었을까?
결승전 경기를 봐야 알겠지만, 이번 경기만 놓고 볼 때
월드컵에서 마주칠 아르헨티나에 대해 허정무 감독은 살포시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 싶네요.
선수 개개인의 역량은 분명 뛰어나지만
경기에 임하기 위한 정신적, 육체적인 준비가 미흡해 보였습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과 에스투디안테스는 분명히 다른 멤버로 구성된 다른 팀이지만
자기들 끼리 흥이 올라야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아르헨티나 축구의 특성은 똑같습니다.
만약 포항 스틸러스의 선수들이 강팀과의 경기 경험이 좀 더 있었다면
경기 내용은 달라졌을겁니다.
우리 국가대표팀은 그런 면에서는 포항 스틸러스보다 준비가 잘 되어 있으니
허정무 감독 입장에서는 "어허~ 요것봐라?"하는 생각이 들었을겁니다.
에스투디안테스는 수비 조직력이 약했으며
공격시에도 돌파와 패스웍은 좋았지만 많이 뛰는 팀을 전략과 조직으로 극복할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데닐손만 대박났네...
데닐손이 포항을 떠난다죠?
계약이 종료되어 본인이 떠난다면 막기는 어렵겠죠.
포항으로서는 데닐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그에게 맞는 조건을 맞추기도 쉽지 않지요.
그의 중요성과 파워는 더욱 강하게 증명되었고,
그를 원하는 팀은 더 많을 것이고,
그에게 제시되는 조건도 더 좋아질 것 같습니다.
골도 잘 넣고 팀에 대한 헌신도 훌륭합니다.
더구나... 이번 경기를 보니까, 골을 잘 막아내는 능력까지 갖추었네요. ^^

서포터로서의 미안함
먼 곳에서 우리 포항 스틸러스 선수들이 너무 외롭게 뛰었습니다.
반면 에스투디안테스는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그들의 지지자들과 함께 뛰었습니다.
가장 힘든 경기에서 그들과 함께 뛰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서포터와 선수들이 함께 뛰면 또 다른 경기력이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두고두고 미안할 듯 합니다.

...

K-리그 전통의 명가, 아시아 챔피언...
그러나 우리 포항스틸러스는 세계 축구의 변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보다 많이 국제경기 경험을 쌓아야하고, 보다 강한 상대를 경험해야합니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가 더 활성화 되어야겠고
유럽이나 남미의 팀들과 부딪칠 수 있는 기회도 더 생겨야할 듯 합니다.

FIFA를 비롯한 축구관련 단체나 기관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야겠네요.
월드컵을 통해서 국가대표팀간 경기는 세계화가 많이 되었지만
클럽 축구는 많이 부족합니다.

한국 축구도, 아시아 축구 더 큰 꿈을 키워야겠습니다.
한발씩 한발씩 더 나아가서...
K-리그 챔피언이나 아시아 챔피언을 뛰어 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포항이 에스투디안테스에게 진 것은...
포항이 약해서 진 것만이 아닙니다. 한국 축구, 아시아 축구가 힘이 없어서 진 것이었습니다.

애시당초...
우리는 남미의 챔피언과 유럽의 챔피언이 맞붙는 경기의 오프닝 게스트 취급밖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촌놈이었고, 그들도 우리를 촌놈 취급 했습니다.
우리는 입장권 밖에 받지 못한 손님이었고,
바르셀로나와 에스투디안테스는 입장권과 식사권과 숙박권을 함께 받는 VIP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