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쟁이가 된 민간인들의 딜레마

2006. 5. 3. 10:27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축구판에서
팬이란 이름으로, 또는 매니아란 이름으로
사람과들과 어울린지도 10년쯤 된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축구에 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보았고
남다른 식견과 지식으로 축구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10년쯤 지난 지금...
그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족쟁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족쟁이 = 축구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축구 전문 기자나 칼럼니스트 방면으로 축구계에 발을 디딘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저 언론사의 경우, 축구 전문 기자를 뽑기 보다는
어학과 일반상식 등을 고루갖춘 기자를 채용하기 때문인지
대부분은 마이너에 속하는 축구관련 잡지나 인터넷 웹진 등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Full-time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글만 쓰고 글값을 받는 사람도 있고...)
아마도... 초창기 축구 매니아들이 형성된 계기가 PC 통신과 같은
온라인 매체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비교적 글빨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마이너쪽에서 일들을 하기 때문에 수입이 넉넉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깊이를 더해 가면서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열심히들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족쟁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프로축구단이나 축구협회, 프로연맹, 실업연맹, 여자연맹 등의
축구관련 기관이나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10년전과 비교한다면...
그때만 해도 각종 축구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실무진들은
대부분이 경기인 출신의 족쟁이들이었는데
아마추어 팬들이 자기 분야의 전공을 살려서
지금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쪽에 뛰어 들어서 진짜 족쟁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입으로 입사한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업부 분야의 배경지식과 경험을 살려서
경력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죠.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축구 자체를 즐기기 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축구가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축구팬, 즉 소비자로 즐길 수 있었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냥... 축구라는 비즈니스 분야의 직장인이 된 것이지요.)

좀 드물기는 하지만 축구 에이전트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이전트의 분야는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대표적으로 선수 매니지먼트가 있고, 경기를 주선하고 관리하는 일,
해외 전지훈련 알선 및 관리, 축구 유학 알선 및 관리 등등...
아직 우리나라의 축구 비즈니스 자체가 그리 활발하지 않아서인지
새로 이 바닥에 뛰어든 사람들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다들 공통적으로 푸념하는 것은...
예전처럼 축구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족쟁이가 될만큼 축구를 좋아한 사람들인데...
경기 운영하느라 경기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예전 같으면 관광삼아 즐겁게 해외 원정을 갔을텐데
지금은 취재를 하거나 선수단을 인솔하거나
현지에서의 운영 및 관리 업무를 하기에 바쁩니다.

족쟁이의 길이 좋은지, 그냥 민간인의 길이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저의 입장에서는 민간인으로 축구를 즐기는게 더 맞아 보이는군요.

그치만...
족쟁이의 길을 뛰어 들어서
스스로 그 세계에서 축구를 만들어 가는 그들은
분명히 저 같은 민간인 보다는 용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저는 축구를 위해 무엇을 바치기 보다는
축구가 선물하는 것들을 즐기려는 사람이고
그것을 즐기기 위한 일상의 안락함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아마도...
족쟁이의 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전처럼 경기장에서 함께 떠들고 웃으면서 이번 독일 월드컵을 즐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게 제일 안타깝습니다.
그 사람들이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다시 그들과 함께 목청껏 소리지르며
함께 웃고, 울고, 때론 욕지거리도 서슴치 핞고,
경기 후에는 함께 어울려 술한잔 기울이면서
어줍잖은 축구 지식으로 뻐꾸리를 쏘아대는...
그런 시간이 몹시 그리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