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

2007. 6. 8. 10:11사는게 뭐길래/난 그냥... 남자!


충북 제천에 '배론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습니다.
과거 천주교 탄압이 심하던 초기 천주교 시절에, 죽음을 피해서 천주교인들이 산속 깊은 곳에 숨어서 천주교 마을을 만들게 되었으며, 지금은 그 마을이 천주교의 성지가 된 곳입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뚝딱 하고 포크레인이 만든 곳은 아니고
초기의 천주교 마을을 시작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금씩 시설을 확충하면서 성지화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제게도 이제는 그런 천주교 성지에 가는 일이 그리 낯선 것도 아니지요.

이야기를 하기가 좀 그렇지만...
배론성지는 저희 부모님께서 생을 마감하신 후에 휴식을 취하게 될 곳이기도합니다.
성지 조성 작업을 하면서 헌금만으로 충당하기에는 돈이 모자라서
성지의 일부분에 납골묘를 분양하게 되었고, 마침 형님네가 원주.제천 교구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상의하여 두 분께서 영원히 휴식을 취하실 곳을 미리 마련해 두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엄청 낯설고 착잡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또는 자신의 부모가 영원한 안식을 취할 곳이 미리 딱 정해져 있고
그 곳을 눈으로 직접 보고 만진다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지요.

나이드신 분들이 더 늙기 전에 영정사진을 미리 찍고, 미리 수의를 준비해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신이 영원히 누을 자리도 미리 마련해 두긴하지만...
마음 착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

지금은 오히려 가족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처럼 되었지요.
여전히 그곳에 발을 들여 놓으면 어머니는 마음이 두근두근하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두 분께서 소중히 생각하시는 천주교 성지의 한 켠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납골묘는 아주 일부 지역에 조금만 있을 뿐
그곳은 그냥 많은 천주교인들이 방문하고, 미사를 보고, 또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항상 밝고 깨끗하고 생기가 넘치는 예쁜 동산 같은 곳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오히려 그래서 좋다고 하십니다.
이 다음에 후손들이 나들이 하듯이 들러서 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서로 웃고 이야기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또한 바로 그 옆에 있는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보실 수 있으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전, 배론 성지에 다녀왔습니다.
성지 일대를 한바퀴 돌면서 산책을 하고, 부모님들께서는 두 분이 휴식을 취할 곳을 둘러보신 후에 성당에서 미사를 보셨고, 저와 와이프와 아들 녀석은 잔디밭 그늘에서 한가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아들 녀석은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잔디밭이 있고, 갖가지 나무와 꽃이 있어서 아주 신이 났었고요.

번잡한 곳을 떠나서, 하루 동안의 경건한 휴식을 바라시는 분들은 배론성지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 파는 사람도 없고 호객꾼도 없으며 입장료도 없습니다.
도시락이랑 돗자리 하나 준비해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만 하면 됩니다.
(음주가무 안됨 ^^)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성당에서 미사를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납골묘는 성지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며
나머지는 각종 기념관과 기념물, 넓은 잔디밭, 맑은 개울이 있는 천주교 공원입니다.

PS) 원래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가장 큰 가치로 제시한 것이, 양반 상놈 부자 가난뱅이 남자 여자의 구별없이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고 존귀하다는 것이었죠?
근데... 좀 재미있는 것이...
배론성지의 납골묘 위치에 따라 분양가가 다릅니다.
납골묘 가운데에 예수님 상이 있는데, 죽어서도 예수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으려면 돈이 좀 더 많이 필요하지요. ^_^
젊은 날에는 자기가 살집 마련하느라고 허리띠 졸라메는데...
죽어서도 좀 더 근사하게 누을 자리를 마련하려면 또 돈이 든답니다.
그리고, 좋은 자리 분양 받기 위해서 미리미리 청약도 해야하고, 청약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도 필요하지요. ^^

우리 형님 왈, "나를 니 형수랑, 우리 애들 자리까지 다 준비해둘걸 그랬나?"

요즘 젊어서부터 노후설계, 은퇴설계 해야 한다고 난리치는데
여기에 '사후설계'도 추가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