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팬에겐 너무나 대단했던 신태용

2010. 12. 18. 10:26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한 팀의 서포터로서 다른 팀의 선수에게 충분한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설사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단지 우리 팀의 적으로 만났다는 이유로 한 스텝 정도는 평가절하되는것이 기본이기도 하지요.

지금까지 포항 스틸러스의 팬으로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저에게 신태용만큼 강하게 각인된 선수나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몇 명 그와 유사한 느낌을 준 선수들이 있습니다.
수원의 이운재나 울산의 김현석도 그런 선수들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경기때면 어김없이 우리에게 아픔을 안겨주었던 선수들...
분노가 치밀만큼 얄밉지만, 그런 일이 두번 세번 반복되면서 무한존경을 표할 수 밖에 없었던 선수들입니다.

신태용은 그 중에서도 유별났습니다.
그가 포항과 지척에 있는 경북 영덕 출신이라는 사실은 더 마음을 쓰리게합니다.
영남대학교를 나왔으면 당연히 포항 스틸러스의 식구가 됐어야할 선수가 다른 팀에서 뛴다는 것조차 맘에 안들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특별할 것이 없는 선수였습니다.
총알처럼 빠르지도 않고 출중한 개인기와 기술로 무장한 선수도 아닙니다.
눈부신 득점력의 스코어링 머신도 아니고 강철같은 피지컬의 선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발끝에서 나오는 플레이 하나하나는 바짝 날이 선 듯이 살아 있었습니다.
어느것 하나 득점이나 승리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을만큼 그의 움직임은 효율적이고 의미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가장 결정적일 때 그의 발끝이 마술을 부리곤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머리로 축구를 했던 사람인 듯 합니다.
경기장 안에서 가장 영리하고 날카롭게 움직였고 승부 근성이 강했습니다.
객관적으로 한 수 위의 팀을 만난다고 해서 접어주는 일 따위는 없었습니다.
상대팀의 관중들로 가득한 원정 경기에서도 냉정하게 승부에 몰입할 줄 아는 선수였고요.

지금의 성남, 과거의 천안 일화, 또 그 전에는 그냥 일화.
솔직히... 축구 팬들에게 있어서 자랑스럽기 힘든 팀입니다.
특정 종교재단의 후원을 받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고, 촌스러운 유니폼과 그 가슴에 새겨진 '생생톤'이나 '진생업' '천연사이다'라는 큰 제품명은 말 그대로 싼티의 결정판, 멋진 전용구장을 홈 경기장으로 가진 팀들과 달리 지금까지도 잔디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야하는 팀, 원정팀에게는 너무나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는 소수의 서포터만을 가진 팀....

자랑스러워하기 힘든 팀이지요.
그 팀의 일원, 그 팀의 팬이라는 것으로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지...
물론 그 팀의 서포터가 아닌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신태용...
이 사람은 그런거 없습니다.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팀, 촌스럽고 투박한 팀의 일원이었지만 신태용은 최고의 팀에서 뛰는 것처럼 플레이를 했습니다.
늘 당당했고, 물러서거나 주눅들지 않았고, 잘난 상대방들을 비웃듯이 빼어난 플레이를 펼쳤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만드는 축구는 예리하게 번뜩였으며 그의 팀은 K-리그의 어느 팀보다 강했습니다.
변변한 국가대표 업적도 없던 그지만, 황선홍과 홍명보를 함께 가졌던 포항도 그에게 무너졌습니다.
당연히, 수 많은 우승과 개인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포항 스틸러스라는 팀이 27년동안 이룩한 우승 횟수보다 신태용 개인이 이룩한 우승이 더 많을겁니다. ^^)

지도자가 된 지금도 그의 축구는 강합니다.
그리 두텁지 못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K-리그의 우승을 넘보고 있으며 아시아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인터 밀란을 상대하면서 "이길 확률이 30~40%는 된다"라고 서슴없이 말을 하며
비록 경기를 내주긴 했지만 인터 밀란보다 더 공격적이고 더 빛나는 경기 운영을 했습니다.
물론... 감독이 된 지금도 변함 없이... 포항 스틸러스에게 강하기도 하지요. ^^
(아... 세상에나... 다시 떠오르네요... 95년의 챔프 결정전. 전반 2대0 앞선 상황에서 후반에 신태용 들어오면서 내리 2 골을 먹었던 그 쓰라렸던 기억이라니... 쩝!)

어쩌면 저는 '신태용 트라우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분명히 그는 저에게 그 정도로 강했고, 날카로웠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수 신태용은 보이지 않는 듯 하면서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장 돋보이는 플레이어였습니다.
감독 신태용은 승부의 맥을 놓치지 않는 지략가의 모습입니다.
선수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의 몸 속에는 람보 보다는 스나이퍼의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상대편으로 그를 계속해서 만나는 것이 싫지만...
상대편인 저조차 무한한 존경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신태용이네요. ^^

포항의 상대편만 아니라면, 저는 기꺼이 신태용의 팬이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