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트가르트] 잉글랜드 아자씨 vs. 독일 아자씨

2006. 6. 27. 17:37월드컵 여행 - 2006 독일/8.슈트트가르트


슈트트가르트에서 잉글랜드:에콰도르 경기를
팬 페스트에서 관전하고 아우그스부르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마침 독일 축구팬과 영국 축구팬이 저와 같은 객실에 앉게 되었습니다.
(좌석 6개가 방으로 구분된 객실입니다.)

처음에는 독일 아줌마 두 명이 함께 있었고
다들 조용히 책을 보거나, 컴퓨터로 뭔가를 만지작 거리는 등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잉글랜드 아저씨는 어디론가 방을 옮겨갔고...
(아마도... 승리의 기쁨을 나눌 다른 친구들을 찾아간 모양입니다.)

중간에 울름(Ulm)이란 곳에서 독일 아줌마 두 명이 내렸고
객실에는 저와 독일 아저씨 두 사람만 있었습니다.

독일 아저씨는 직접 경기장에 가서 보았는데
암표를 못사고 팬 페스트에서 본 저를 보고 행운아라고 하더군요.
그 비싼 암표값을 지불하고 보기에는
잉글랜드가 많이 부족했다고 했습니다.

마치 연습게임을 하듯이...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다 보여주지 않았고
경기의 내용도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번 월드컵에 나선 독일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좀 나누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스타는 없지만
팀웍이 굉장히 좋고, 최전방의 클로제가 중요할 때 제 몫을 해 주기 때문에
독일팀이 경기를 잘 하고 있으며
8강에서 아르헨티나를 만나는 것이 좀 걸리긴 하지만
결승까지 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

이 때, 자리를 비웠던 영국 아저씨가 들어왔고
객실에는 저와 독일 아저씨, 그리고 영국 아저씨 세명...

그런데... 이때부터 약 1시간 동안
열차가 아우그스부르그에 도착할 때까지
영국 아저씨가 쉴새 없이 썰을 푸는 통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왔습니다.

영국 축구는 물론 독일 축구와 다른 팀에 대한 평을 쫘악 읊어 대면서
썰을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하는데...

이게 또 저를 재밌게 만든 것은
영국과 독일의 미묘한 앙숙관계였습니다.
한일관계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미묘한 앙숙관계가 있더군요.

영국 아저씨가 풀어 놓는 앙숙 관계에 대한 썰들이 아주 골때리더군요.

"정말 이런말하기 미안하지만, 여전히 영국 사람들은 독일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로 말문을 열더니만...

ㅋㅋㅋㅋ

영국 스포츠 사상 최고의 업적 세 가지가 있으니...

3위, 1966년(?) 영국의 월드컵 우승
2위, 올림픽에서 어떤 선수가 5개의 금메달을 땄던 일
...

그리고, 영광의 1위는
월드컵 예선, 홈 에서 1대0으로 독일에 깨진 뒤
뮌헨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독일을 5대1로 물리친 것이랍니다!

그 아자씨 왈...
월드컵 결승전도 아니고, 4강전도 아니고, 본선 조별경기도 아닌...
고작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지만
영국이 독일의 안방에서 5대1로 그들을 무찌른 것이
영국 스포츠 팬들이 가장 자부심을 가지는 결과였다고 하더군요.

....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자씨의 썰은 계속됩니다.)

독일의 8강전 상대가 아르헨티나인데, 그 경기는 걱정하지 말라더군요.
영국이 독일을 싫어하지만, 아르헨티나는 훨씬 더 싫어하니까
영국 사람들은 독일을 열렬히 응원할거랍니다.

포틀랜드 전쟁도 있었고
86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아르헨티나 경기에서는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과 함께
마라도나가 잉글랜드를 농락하듯이 5명(6명?)을 제끼면서 골을 넣어서
자존심을 억세게 건드려 놓았고
영국 사람들이 볼 때, 아르헨티나 축구는 너무 치사하게 군다는군요.
하여간... 그래서, 아르헨티나가 독일보다 훨씬 싫답니다.

....

자기가 매주 목요일에 축구 모임에 나가는데
자기와 친한 독일 친구도 함께 모임에 나간다는군요.

그런데... 어느날 그 친구가 아르헨티나 레플리카를 입고 모임에 왔답니다.
그러자 모임에서 난리가 났다는군요.

"넌 그렇잖아도 독일 사람이라서 거시기한데...
거기다가 아르헨티나 옷을 입고 나타나면 어떡하냐!"

그리하야... 결국은 그 독일은 아르헨티나 레플리카를 벗고
그냥 셔츠를 입고 축구를 했답니다.

(완전히 뒤집어지는 분위기... ㅋㅋㅋ)

....

잉글랜드 아자씨가 썰을 푸는 과정에서
독일 아자씨와 잉글랜드 아자씨 사이에는
서로 매너는 지키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은근히 서로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비추고
약간씩 상대편은 좀 깎아 내리는 묘한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ㅋㅋㅋ

잉글랜드 아자씨는 영국 축구의 현재 문제점을 에릭손 감독이라고 하더군요.
역대 어느 때 보다도 좋은 멤버를 갖추었지만
에릭손은 6년 내내 전술 시험만 되풀이했고
오늘 경기에서는 지난번 경기와 또 다른 전술을 시험하더라...
감독을 바꿔야한다.

2002년에 히딩크는 무명의 한국 선수들을 잘 조직해서
놀라운 경기를 펼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독일은 걸출한 스타는 없지만 (요러면서 독일을 살짝 깎아주고...)
클린스만 감독이 얼마나 탄탄한 조직력을 구축했는가? (다시 올려주고!)

발락은 훌륭한 선수다.
그렇지만 그는 다소 게으른 스타일의 선수다. (또 살짝 깎아주고...)
그러나, 이번 월드컵에서 발락은 정말 훌륭한 팀의 리더로 뛰고있다. (올려주고!)

....

독일 아자씨는 약간 접어주는 분위기였슴다.
잉글랜드 아자씨의 썰이 워낙 쉴새없이 휘황찬란하게 전개되기도 했지만
왠지 영국 사람들 앞에서는 한풀 접어주는 것 같더군요.

독일 아저씨 하는 말이...

독일 사람들이 국기를 몸에 두르고
얼굴에 국기를 페인팅하고
'도이칠란드'라고 소리 높여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
자기로서는 이번 월드컵의 가장 큰 보람이랍니다.

2차 대전 이후로
독일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게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늘 어디서나 독일인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숙여야 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놓고 자기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되어서 굉장히 좋다고 했습니다.

영국 아저씨도 이 부분에는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막상 독일에 와서 월드컵을 겪어보니
대회 준비도 잘 되어있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도 많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영국보다 훨 좋고...
등등등... ('등등등'은 제가 잘 못 알아먹은 부분 T.T)

충분히 독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만하며
영국 사람들도 이전보다 독일을 훨씬 좋게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친해질 듯 친해질 듯 하면서 자꾸 멀어지는 한일관계를 늘 접하는 입장에서
일면 수긍이 가고...
그러면서... 일본은 왜 독일처럼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지워 나가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

열차가 도착할 쯤...
박지성의 등번호가 찍힌 핸드폰 줄을 두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고
잉글랜드 아자씨는 또 박지성에 대한 칭찬을 줄줄이 풀어제끼고...

덕분에 피곤하고 심심하고 지루할 것 같은 시간을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보냈습니다.

물론... 다행히(?) 잉글랜드가 이겼기 때문이겠죠.
만약 그들이 졌다면 돌아오는 기차안은 무척 침울하고
약간은 살떨리는 분위기가 되었겠죠?

역시... 경기는 이겨야하고 승자가 여유와 관용을 베풀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