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연패 끝, 역시 포항답게!

2024. 9. 23. 23:59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살다살다 6연패를 다 당해보네요. 포항 팬으로 살아온 30년 동안 가장 길게 엎드린 시간이 아닐까 싶네요.

거의 두 달 동안 패배의 우울함이 어른거리는 월요일로 한 주를 시작했었는데, 이제 다시 아주 상쾌한 월요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어요!
(날씨 탓일까? ㅎㅎ)

6연패 중 5연패 직관

공교롭게도 포항이 6연패하는 동안 그 중 5경기를 직관했습니다. 직관 승리는 기쁨 두 배, 패배는 슬픔 두 배.  연패하면 슬픔은 제곱으로 커지죠. 2의 6승은 64배 ㅜ.ㅜ

마지막 광주에게 6연패를 당했을 때는 정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좌절감과 허탈함이 몰려왔습니다. 서포터스의 콜 리더는 경기 후 박태하 감독과 완델손 주장의 해명 내지 사과를 요구했고, 다른 한 쪽에서는 남의 집에서 왜 우리 애들 혼내냐며... 일단 포항으로 가서 뭐든 하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모두가 낙담, 분노, 공포, 안스럼 등 아주 악질적인 공기 속에서 6연패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완전 멘탈 붕괴. 추석을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방전된 느낌? 코로나 걸렸을 때의 무기력함 같은 것이 밀려왔습니다...  (간이 키트로 검사도 했어요.  다행히 음성)

어쩌면 7연패가 될지도 모르는 강원과의 경기, 그 경기를 차마 현장에서 볼 수 없는 나의 나약한 멘탈이라니... ㅜ.ㅜ

선수들은 어떨까요? 탈진된 몸과 마음을 추스려 다시 연습하고 시합을 해야겠죠. 정말 얼마나 하기 싫을까...
감독은 또 그런 선수들을 다독이고 윽박지르면서 이미 쥐어짠 몸과 마음을 한 번 더 쥐어 짜도록 만들어야할거고요.
연패를 끊는 그 날까지 이 잔인한 과정이 반복되겠죠.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모두 다를겁니다. 새로운 동기 부여, 전술의 변화, 파격적인 선수기용, 책임자 처벌,  충격요법, 자본주의적 접근... 등등

우리 포항의 방식은? 다분히 포항적인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얻어 맞으면서 묵묵히 버텨내기...
아마 이게 우리 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을 겁니다.

다행히 선수들과 감독 사이의 신뢰는 유지된것 같습니다.  팬들 또한 실망과 분노의 시간이 있긴했지만 결국은 믿고 기다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게 우리가 50년 동안 체득한 경험이자 소위 우리의 DNA란 걸 다같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감독이 박태하잖아요. 박태하도 분명 부족한게 있겠죠. 최일선에서 6연패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사람도 박태하지만, 지금까지 박태하에게는 언제나 포항이 최우선이었고 아낌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는 걸 모르는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일곱번째 경기가 돼서야 우리의 방식으로 연패를 끊고, 무승부로 끝날 경기를 기어이 마지막 순간에 승리로 이끌고, 서로의 간절함과 신뢰를 더 크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7경기 중에 마지막 단 하나의 승리지만 우리는 이렇게 또 하나의 진한 스토리를 만들었네요.

돌이켜보면....

김천, 서울에 연패를 당한 후 맞이한 전북과의 원정경기가 변곡점이었던 것같네요. 그 경기에서 좀 더 모험적인 라인업과 전술을 들고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니면, 전반 실점 후 하프 타임에 선수들의 멘탈을 끌어 올리는 감독의 강한 자극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예를 들어, "이게 팀이야?"(의자 강타) 같은 ㅎㅎ

그게 아니었다면  전북전 극장골 패배 맞이한  대구와의 홈 경기에서 충격과 파격을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합니다.

다 지나간 얘기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서 더 긴 터널을 지나야했을지 모르지만... 설사 6연패를 당할지언정 그냥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팀은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젠장... 다시 생각나네요. 경기 전부터 비 쫄딱 맞고, 신광훈은 퇴장 당하고,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던  김종우의 결정적인 슛은 실패, 그리고 종료직전 권창훈의 골... 왠지 쌔했던 그날 전주의 습한 저녁 공기까지....
아쉽고 아쉽고 아쉬웠어요 ㅜ.ㅜ


전북 --> 포항 --> 강원

강원과의 경기는 포항이 전북에게 당한 경기와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도 상대 팀도 연패를 끊어야할 경기, 홈 팀의 리드, 다시 동점, 경기 내용은 앞서지만 왠지 뒤집지는 못하고, 그나마 무승부로 마치면 연패는 벗어나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그 순간에 승리가 더 간절한 홈 팀의 몸부림과 집중력으로 쥐어 짠 극장골!

그 경기가 우리를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끌어 내릴줄 몰랐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그 시나리오 그대로 지옥에서 탈출했습니다.

....

모르겠습니다. 남은 경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승리를 거둘지, 마지막 순위는 몇 등일지, 다시 만나는 상대들과 어떤 경기를 펼칠지...

다만,  이번 경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우리만의 끈끈함을 다시 한 번 공유한 것만으로도 6연패의 아픔을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아프고 긴 여름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 쨍한 가을 하늘을 웃으면서 즐길 수 있어서... 아!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