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2. 14:09ㆍ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먼저 기억을 더듬어...
1998년의 포항 스틸러스는 기쁨과 좌절이 절묘하게 배합된 폭탄주를 마신듯한 시즌이었습니다.
시즌 1위로 마칠 수 있는 상황에서 맨 마지막 한 경기를 지는 바람에 3위로 내려앉았지만,
포항에서 열린 포항과 울산의 플레이오프 1차전은 지금까지 단연 K-리그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경기입니다.
연장 막판에 동점, 역전, 재역전이라는 드라마가 이어졌고
연장 추가시간에 터진 백승철의 결승 중거리 슛으로 포항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경기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울산에서 벌어진 2차전은 포항에게 챔프 결정전 티켓이 거의 넘어온 상황에서 (이번에도 종료직전) 골키퍼 김병지의 헤딩 슛이 꽂히면서 주인공이 포항에서 울산으로 바뀌는 또 한 번의 명승부가 있었지요.
1998년... 이 한해는 거의 포항 스틸러스와 함께 뒹굴던 시절이었습니다.
1년 내내 포항의 모든 경기를 다 봤는데...
맨 마지막 플레이오프 2차전은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저 말고 포항의 전 경기를 소화한 사람은 딱 두 사람입니다. 선수 중에는 박태하, 서포터 중에는 홍상혁 ^^)
그렇게 결정적인 경기를 못 보게 됐고... 마치 내가 못가서 진건 아닌지하는 괜한 자괴감...
1차전을 그렇게 멋지게 이겼으니 2차전은 보고 싶은 마음이야 얼마나 굴뚝같았겠습니까...
꼭 포항이 이걸것만 같았고, 또 그걸 이기고 챔프전에 올라가서도 승승장구 할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생신과 딱 겹쳤습니다.
아버지 생신을 앞둔 주말에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데, 바로 그 날 경기가 있었던 것이지요.
축구가 좋고, 포항 스틸러스가 아무리 좋다고는 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아버지 생신까지 불참할 정도로 제가 싸가지가 없지는 않거든요. ^^
....
2012년 10월 20일.
이 날이 그 날입니다. T.T
연장후반 막판, 경기 종료 직전에 터진 결승골로 포항이 FA컵을 먹던 날.
포항의 레전드 황선홍이 다시 돌아와서,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펑펑 눈물을 흘리던 날.
선수시절처럼 멋지게 점프를 하지는 못했지만, 스틸야드의 철망에 황새가 다시 올라서던 날.
그리고... 또 아버지의 생신 모임이 있던 날...
저는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달렸습니다.
힐끔힐끔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중간중간 결정적인 찬스나 세트피스 상황이 되면 도로변에 차를 잠시 세우기도 했습니다.
막판 연장 종료 직전에는 신호등에 걸려있는 상황.
승부차기를 보기 위해서 차를 아예 옆으로 빼려는 그 상황에서... 터져 버렸네요. ^^
박성호의 살짝 벗겨진 머리가 절묘하게 공을 표면을 얇게 깎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면서 공이 골문을 통과했습니다.
경기내내 애써 침착했던 황선홍이 펄쩍펄쩍 뛰는 모습... 선수 시절에도 그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요.
중계방송은 뭐가 그리 급한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둘러 중계를 끝내버렸고...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우승팀의 셀레브레이션이야말로 축구팬들에게 꿈이 실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인데
왜 그렇게 매정하게 중계를 끊어버려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선홍과 박성호의 눈물, 노병준의 환희, 팬들의 행복한 모습, 꽃가루, 샴페인,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들의 함성과 신나는 군무...
스틸야드의 우승잔치야말로 팬과 선수가 가장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스틸야드의 장점이 고스란히 보이는 최고의 모습인데 말입니다.
저는 머릿속으로 경기가 끝난 후의 스틸야드를 그려 봤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 거기에 내가 없는지 너무너무 약이 올랐습니다.
지금 그곳에서는 내가 아는 몇몇 얼굴들이 자기가 세상 최고인냥 마냥 기쁘게, 한껏 거만을 떨면서,
미친듯이 포효하면서, 120분의 연장혈투 후에 또 한 번의 경기를 더 치를 것처럼 에너지를 뿜고 있을텐데 말입니다.
경기장에서의 셀레브레이션이 끝나면 포항 시내를 밤늦게까지 점령할 그들의 모습이 너무 약이 올랐습니다.
거기에 함께 있지 못했던 아쉬움...
아마... 한 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 같습니다.
선수시절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황새와 그 기쁨을 다시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돌이켜보니 당대의 황선홍이었지만 그와 함께 스틸야드에서 우승의 기쁨을 나눴던 기억이 없습니다.
비록 경기장에는 갈 수 없었지만, 이렇게나마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큰 행복이지요.
.....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제 생각하는 우승의 조건은,
1) 실력
2) 간절함
3) 하늘의 도움
실력은 포항과 경남이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포항이 앞서기는 했지만, 결승전 한 경기의 내용을 놓고 봤을때는 전혀 차이를 못느꼈습니다.
오히려 경남이 더 나은 모습을 보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간절함?
포항과 경남 어느 팀인들 우승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을까요?
경남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과 집중력만 봐도 그들의 간절함이 포항에 못지 않았을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도움은?
일단 경기 장소가 스틸야드였다는 점에서 하늘은 1차적으로 포항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추첨을 통해서 얻은 기회인만큼, 이건 하늘의 도움이라고 밖에 설명을 못하겠네요.
경기 막판의 결승골...
여기에는 간절함과 하늘의 도움이 반반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승부차기로 가는 상황, 선수들의 체력도 바닥날 대로 바닥난 상황.
만약 승부차기로 간다면, 비록 어웨이이기는 하지만 김병지의 경남이 유리할 수 있는 상황.
마지막 1분의 상황에서, 마지막 혼을 담은 신진호의 킥, 그리고 마지막 혼을 담은 박성호의 점프,
머리에 공이 닿는 그 순간에 담긴 간절함은 최대한 머리를 돌리면서 공의 방향을 골문으로 틀었습니다.
이 순간에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습니까?
마지막 남은 힘과 정신을 쥐어짜서, 감각적으로 점프를 하고, 머리를 공에 대고, 방향을 돌리는거지요.
다만... 아주 정성껏... 그냥 헤딩슛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골을 만들겠다는 간절한 의지가 담긴 마지막 터치를 하는 것...
헤딩을 한 후 떨어지면서도 끝까지 고개를 돌려 공의 궤적을 바라보는 박성호의 모습에서
마지막 한 순간까지 살아있는 그의 정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성호의 머리를 떠난 공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거지요.
팬들의 간절함, 선수들의 간절함, 그리고 박성호의 간절함이 하나로 버무려져서
그 슛은 가장 이상적인 방향으로 아름답게 날아갔습니다.
당분간 내 기억을 지배할, 가장 아름다운 포물선이었습니다. ^.^
마지막 세트 피스가 경남에게 주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여졌을지 모르지요.
아니면, 승부차기까지 갔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스틸야드에서 결승전을 갖게 된 것이 첫번째 하늘의 도움이고,
마지막 세트 피스 기회가 포항에게 주어진 것이 두번째 도움이었습니다.
1998년의 울산...
그 때는 마지막 세트 피스의 기회가 울산에게 주어졌고
김병지의 슛이 포항의 골문을 가르고 말았지요.
2012년의 포항...
그 때 마지막 세트 피스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골을 넣었던 김병지가 지키는 골문.
그 김병지를 넘어서 포항의 우승을 매듭짓는 골이 터졌습니다.
1998년의 울산처럼,
또 2012년의 포항처럼,
언젠가... 경남의 홈 구장에서 그들의 손에 의해 아름다운 승리가 만들어지는 날이 오겠지요.
하늘이 경남에게 역사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겠지요.
우승을 하기 위한 네번째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하겠네요.
4) 기다림...
...
다시 스틸야드에서 챔피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또 얼마를 기다려야할까...
아..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고 약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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