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1월 11일의 포항, 그리고 황선홍

2010. 11. 11. 13:17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1995년 11월 11일. 딱 15년 전 오늘이군요.
포항 스틸러스와 성남 일화(당시 일화 천마)가 K-리그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을 치른 날입니다.
K-리그 팬들에게 역대 가장 드라마틱한 경기로 손꼽히는 바로 그 경기가 열린 날입니다.

물론, 저도 그 날 경기장에 갔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축구를 보고 싶어하는 외국인 친구들까지 데리고 갔었지요.
분명히 포항이 이길 것 같았기에, 제가 좋아하는 팀의 우승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1차전을 1대1로 비겼기에 2차전 홈경기를 치르는 포항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고
전력면에서도 황선홍, 라데, 박태하, 홍명보가 주축을 이루는 포항이 우세했기 때문입니다.

전반전은 황선홍이 2골을 넣으면서 완전히 포항의 분위기였습니다.
아... 지금도 멋진 발리 슛으로 골을 넣은 후 경기장의 철망을 잡고 포효하던 황선홍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릴정도로
그날의 경기는 온 몸에 백만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했습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후반전에 2골을 내리 내주면서 동점이 되었고
급기야 경기 막판에 2대3으로 역전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기어코 그날의 경기를 명승부로 만들려고 했는지...
후반전 추가시간이 끝나갈 무렵 기어이 라데가 동점골을 만들어냈지요.
결국, 그날의 경기는 3대3으로 끝이났고
3차전에서 포항이 0대1로 지는 바람에 챔피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2007년에야 포항은 다시 챔피언이 될 수 있었지요... T.T)


위의 사진은 종료직전 라데의 극적인 3대3 동점골 득점장면입니다.
사진의 맨 앞에 주장 완장을 차고 점프하는 선수가 홍명보, 라데와 1대1 대결을 펼치는 수비수는 안익수.
천당과 지옥을 오가던 그 경기의 짜릿함이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전설과 같았던 그때의 선수들은 이제 각 팀에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포항에게는 너무나 잔인했던 신태용은 그 때 그 팀의 감독이 되었고,
전반전에 2골을 넣으며 스틸야드를 흥분시켰던 황선홍은 다시 포항의 감독으로 돌아옵니다.
홍명보는 올림픽대표팀의 감독이 되었고, 박태하는 A 대표팀의 코치가 되었습니다.
상대팀 선수였던 안익수와 고정운은 이후에 다시 포항의 유니폼을 입고,
우리에게 주었던 눈물보다 더 많은 기쁨을 되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경기... 전설이 된 선수들....
15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포항이라는 울타리에서 하나 둘 떠났지만
그 모든 사람들에게 포항 스틸러스가 고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서포터란게 무엇일까요?
팀이 1등을 하건 꼴찌를 하건, 선수와 감독이 들어오고 나가건 간에...
결국은 그 팀에 대한 지지를 버릴 수 없는 고향집 집사 같은 존재가 아닐런지요.
그러면서... 언젠가 우리 기억속 전설의 주인공들이 다시 돌아와서
그 때 못다 이룬 꿈을 다시 이룰 때를 기다리고
그 시절의 무용담을 술안주 삼아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하고...
내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팀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포항 스틸러스의 서포터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드라마가 있고, 그 속에서 함께 기억을 나누었던 전설같은 선수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포항으로 돌아올 그 시절의 동지들을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황선홍이 포항으로, 스틸야드로 돌아옵니다.
홍명보도 박태하도... 언젠가는 다시 스틸야드에 설 것입니다.
그 때의 전설 같은 경기처럼... 그들이 이끄는 선수들이 또 다른 전설을 만들겠지요.

다시 스틸야드로 돌아온 황선홍.
그의 어깨에 우승의 부담을 너무 크게 지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시 한 번 그와 한 팀이 되어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포항 스틸러스의 서포터들,
그들은 다른 어느 팀의 서포터들 보다도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