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게임, 축구에 대한 씁쓸함
2006. 12. 15. 13:14ㆍ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우리는 우승할 자격이 있는가?
실력, 즉 팀 전력으로 볼 때 우리는 분명히 우승할 자격이 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리 팀은 아시아 최강의 실력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경기의 승패, 특히 축구 경기의 경우 실력이 보장해 줄 수 있는 부분은 기껏해야 60-70% 정도가 아닐까? 나머지는 컨디션, 운빨, 경기장 분위기 및 환경, 심판 등등)
자격은 충분히 있었다!
왜 우리는 4강에서 고꾸라졌을까?
이라크 선수들의 더티한 매너와 심판의 어정쩡하고 미숙한 경기 운영 (그것도 우리에게 불리하게...)
이런 내용은 분명히 우리 팀이 패하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한 공격을 했음에도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공격의 빈도에 비해서 결정적인 찬스는 턱없이 부족했다.
상대팀의 잠그기에 당해내지 못했고, 오히려 간간이 펼쳐지는 그들의 역습에 허둥대는 모습까지 보였다.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잠그기로 나오는 팀을 깨는 방법이 미숙하다.
골 결정력이나 전술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선수들의 플레이 방식이라든가 자신감의 문제다.
7명 내지 8명이 수비에 포진한 상대를 놓고는 아무리 돌진을 한다고 해도 득점이 쉽지 않다.
공격에 또 공격, 그리고 계속해서 페널티 에리어로 볼 투입, 우리 팀의 장신 뽀대 포스트를 향한 쉼 없는 크로스와 헤딩 떨궈주기...
이런 플레이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두드리고 두드리다보면 골이 얻어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일 뿐이다. (조금 확률이 높은 복권을 계속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보다는... 좀 더 여유있게 완벽하고 세밀하게 100%짜리 찬스를 잡아낼 수 있는 여유와 노련함이 필요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수들 스스로 자신감에서 우러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하며, 보다 영악할 필요가 있다. 서두르는 플레이, 단순화된 공격은 결국 자신감 부족에서 오는 조급함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후반 종료 10분전에나 나올법한 무차별 대쉬를 90분 내내 반복한 셈이다.
두번째 문제는, 선수 개개인의 1대1 공격 능력의 한계!
볼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간수할 줄 알고, 상대의 거친 압박 속에서도 온전하게 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
우리 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는 체력과 스피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밀리지 않는 압박 능력이 생명이다. (이것은 전제조건이다. 이게 안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나... 수비에 7-8명이 포진하는 상대와 싸울 때, 이러한 능력들은 우리의 볼 점유율과 공격 빈도는 높여줄 수 있지만 결정적인 골 찬스를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점점 우리보다 강한 상대에게만 최적화된 팀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 과거 최순호나 이태호, 정해원 같이 중앙에서 세밀하게 상대를 1대1로 제압하는 공격수들은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춘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거의 모든 공격수들이 차범근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현대 축구의 기본을 이루는 체력과 스피드 위주의 압박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그저 앞으로 성장하는 선수들은 체력과 스피드 외에 각 개인의 특징을 살린 개인 기술을 더 연마하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세번째는, 근거 없는 단조로움이다.
경기 내내... 방송을 중계하는 캐스터도 같은 말을 반복한다.
"중앙으로 올리면 김동현 선수가 떨궈 주는 플레이가 나와야 한다."
(맞장구는 치지만... 과연 해설자도 그렇게 생각할까?)
약팀을 상대할 때면, 크로스의 빈도는 많지만 올라가는 공의 스피드와 예리함이 평소보다 떨어지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골로 연결될 확률은 10%지만 페널티 에리어로 올려줄 확률은 100%인 완만한 크로스 10개를 시도하는 것보다, 비록 제대로 올라갈 확률은 떨어지지만 올라가기만 하면 50% 이상 골로 연결될 수 있는 낮고 빠르고 예리한 크로스를 2-3번 시도하는게 더 낫지 않겠는가?
골을 올려주기만 하면 우리의 장신 공격수가 머리를 갖다 댈 것이고, 혼전 상황에서 집어 넣거나 떨어뜨린 볼을 어떻게든, 언젠가는 우리가 골로 연결할 것이라는 생각...
막연한 환상일 뿐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볼 것 같으면, 우리가 강팀을 상대로 수비에 중점을 두면서 역습을 통해 승리를 거두는 방식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약한 상대일수록... 자분자분 조져나가는게 정석이다.
그리고, 페널티 에리어에 밀집된 수비수들을 두고도 측면이 아닌 중앙에서 골 찬스를 만들 수 있을 때라야 측면에서의 크로스 또한 더 위협적인 공격 수단이 될 것이다.
아울러, 측면의 윙 포워드들도 앞으로는 좀 더 중앙쪽으로 파고드는 플레이를 펼칠 필요가 있다. 스스로 돌파하건, 패스를 주고 이동을 하건... 잘 하든지 못 하든지 간에... 해외 축구를 보더라도 윙 포워드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득점 찬스에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들을 욕할 수 있을가...
어젯밤 3-4위전은 공중파에서 TV 중계도 하지 않았다. 나쁜 것들...
그러나, 그들이 중계를 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볼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4강에서 미끄러진 것으로 아시안 게임에서의 축구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욕을 퍼붓기는 좀 민망할 것 같다.
(나중에 알고보니 MBC에서 중계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밤 11경에 중계 채널을 찾아 이리저리 리모콘을 누르던 나는 왜 중계를 찾지 못했는지.. 쩝!)
선수들은 어떨까?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처럼 메달을 향해, 우승이라는 명예를 위해, 알량한 연금 포인트를 따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일부 작용하겠지만...)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금메달을 따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 서글프다.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좀 더 고귀하고 명예로운 명분과 가치가 있을 때라야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투혼과 의지, 숭고한 스포츠 정신이 나타날텐데 말이다.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서 뛴다는 것으로만 동기유발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금메달을 따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은 너무 허무하다.
나는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서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경기 그 자체의 승리와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 뛰는 대표팀을 보고 싶다...
그래도 얻은 것은 많다
무엇보다 소중한 대표팀 선수로서의 경기 경험을 얻었고, 승리에 대한, 발전에 대한 동기를 얻었을 것이다.
감독 입장에서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여러 경기를 치르면서 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또한 선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많이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A-매치는 아니지만... A 팀 베테랑들을 대신해서 국가를 대표하는 주전 선수로 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어린 선수들이 앞으로 발전하는데 큰 자양분이 될 것이다.
염기훈, 오장은, 오범석 같은 선수들의 활약은 특히 눈여겨볼만 하다.
그동안 대표팀의 일원으로 이름 석자를 올릴 기회는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이번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자신들의 발전과 동기부여는 물론이고, 팬들에게도 스스로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 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내년 시즌... K-리그에 다시 돌아온 그들은 올해보다 더 강해져 있을 것이고, 그런 그들의 경기를 보는 팬들은 그만큼 즐겁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윤은혜씨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카타르에서도 축구 경기를 한 밤중에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안정환이나 이동국, 박지성, 이영표가 나오지 않은 이유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 ^^)
노무현 대통령은 축구 대표팀이 4강에서 미끄러지는 것과 부동산 문제는 상관관계가 없음을 눈치챘을 것이고, 박근혜씨는 축구 경기 후에 남북 선수가 서로 악수를 하는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을 것이고, 유재석씨는 아시안게임 축구 대표팀을 상대로 무한도전 멤버들이 전원수비 작전을 통해 무실점에 도전하는 방송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을테고, 북한에 대해서 크게 반감을 가지며 '붉은악마'라는 명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오히려 북한과의 경기에서 한국 응원단이 하얀 티셔츠를 입은 사실을 통해서 북한과의 축구 경기도 할만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나의 와이프는 밤잠을 안자면서 축구 중계를 보더라도 남편의 뱃살이 빠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얻은 것이 참 많았다. ^_^
다만... 2002년 이후에 유소년 축구 프로그램을 마구 쏟아냈던 스포츠 센터 사장들이 유소년 축구 교실 대신에 유소년 수영 교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다.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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