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L4강] 울산(1<4:5>1)포항 - 한 번을 이겨도 아프게, 더 아프게

2021. 10. 22. 13:49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전지적 포항시점의 관전기(직관), 울산(1<4:5>:1)포항, 2021.10.20(수), ACL 4강(전주)

아마 포항과 울산의 동해안 더비가 그냥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이었다면 이렇게 치열하고 짜릿하지는 않았을 것같다. 올해도 기어이 가장 극적인 순간에 가장 아픈 방법으로 포항은 울산을 무너뜨렸구나! ㅎㅎ

수십년간 축구 경기를 보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더 간절한 팀이 이긴다"는 것이다. 아마 아시아 챔피언이 되겠다는 울산의 간절함보다 울산을 한 번은 밟아 주겠다는 우리의 열망이 더 컸던 것같다.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한 것도 좋고, 울산을 밟고 결승에 올라서게 되어 더 좋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우리 선수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강한 연대의식과 DNA를 대물림했다는 것이다. 꼭 이겨야하는 상황에서, 하나로 똘똘 뭉쳐서, 정말 간절하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후에 느낄 수 있는 쾌감과 자부심과 보람과 자신감을 포항의 어린 선수들이 충분히 가슴에 새겼을 것같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 울산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짜릿한 것인지 충분히 느꼈을 것같다. (물론 울산에게는 트라우마가 대물림 됐겠지만 ^^)

 

남들이 어떻게 예상하건 승부는 우리가 우리의 방식으로 결정하는거지! 김기동은 말이야... 밑장 빼기를 그렇게 여러번 해 놓고도 손모가지가 붙어있다. 사용할 패는 다 사용한거 같은데 아직도 보여주지 않은 패가 있고 아직도 빼낼 밑장이 남아았다니! 김기동과 K리그 승부 조작단이라고 해야할까? ㅎㅎ

끼워 맞추기 나름이긴하지만 뭔가 우리가 일을 저지를 것같은 촉은 이미 8강전부터 오기 시작했다. 뭉쳐야할 때는 만사 제치고 올인하는 포항 특유의 분위기, 8강전 치고는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은 전북과 울산, 울산 서포터스보다 훨씬 위용있게 경기장 분위기를 장악한 포항 서포서스, 큰 경기지만 워밍업 몸놀림이 가볍고 시종일관 신나 보이는 선수들.

그리고 두둥~~ 원정팀임에도 우리가 검빨을 입고 입장한다!!!


그냥 막 그냥 전 우주가 포항의 승리를 위해 힘을 모아주는 그런 느낌이 초장부터 밀려온다. 이런날은 된다. 선수가 미치는게 아니라 공이 미쳐서 지가 막 알아서 들어가버리는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는 느낌이 빡!

전북이 큰 일 했네!

경기 초반부터 울산 선수들의 움직임이 둔해보였다. 전방에서 부딪치는 대신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나타났고 세컨볼 서드볼 모두 우리가 잡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예상대로다. 울산은 8강전 전북과의 경기를 너무 치열하게 치렀다. 육체적으로도 힘들겠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을 것이다. 명승부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타이밍에 따라서는 그 다음 경기를 말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패배한 전북이 더 많은 상처를 입었겠지만 울산의 피해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이번 아챔에서는 전북 덕을 좀 보는 것같다. 조별예선에서는 전북이 마지막 경기에서 세레소오사카를 잡아주면서 포항의 16강에 도움을 주더니 8강에서는 울산과 치열하게 싸워줬다.

포항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다. 전주성의 주인인 전북을 홈 팀으로 상대하는 것보다는 울산을 상대하기 때문에 어웨이의 핸디캡이 없다. 게다가 상대가 울산이라면 우리의 전투력이 최소 20%는 상승한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울산이 8강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붙도록 120분간 명승부까지 펼쳐줬다.

뭐랄까... 그동안 울산을 잡으면서 적립해온 전북 마일리지를 쓰는 기분이랄까? 울산은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되는 날은 공이 알아서 들어간다

울산은 선제골을 넣고도 좀처럼 경기 분위기를 끌고가지 못했다. 그만큼 지쳐있었던 것같고 자꾸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게다가 원두재의 퇴장... 울산은 이후 더 움츠리게 되었고 포항은 더 공격적으로 밀어부쳤다.

포항은 계속 밀어부치면서도 마지막 찬스에서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랜트의 너무나 완만하고 밋밋한 헤딩이 큰 포물선을 그리면서 골이 됐다!

그랜트에겐 미안하지만, 이건 정말 헤딩이 좋아서가 아니라 공이 알아서 들어간게 아닌가싶다. 전혀 위력적이지 않은 공이 아웃될듯 말듯 조현우 키를 넘겼고, 조현우는 건드릴듯 말듯 애매하게 손을 뻗었다. 전반전 이승모의 송곳같은 멋진 헤딩은 골 포스트를 맞고 밖으로 공이 밖으로 튀었는데, 그랜트의 장거리 아리랑 헤딩 볼은 골 포스트를 툭 건드리면서 안으로 떨어졌다.

종료 3분전, 뭔가 판타스틱하지 않고 미지근하게 들어간 아리랑 헤딩 동점골. 기가막힌 타이밍에 신의 마사지를 받은 아주 더러운 골이 터졌다.우리에겐 우주의 기운이 몰려오고 울산에게는 더비의 악몽에 이은 멘붕이 시작됐을 것이다.

현장의 분위기와 선수들의 사기, 11대10의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남은 추가 시간이나 연장전에서 우리가 충분히 골을 뽑아낼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120분 1대1 무승부, 승부차기 돌입!

승부차기는 하늘만 아는데, 오늘은 하늘이 우리편!

굳이 의미를 가져다 붙인다면 포항이 울산보다 더 간절했다고할까? 그리고, 경기 내내 지배했던 "오늘은 되는 날"의 분위기와 기운?

다른건 몰라도 우리가 더 집중하고 더 간절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승부차기가 진행되는 동안 센터 서클에 도열해 있는 선수들의 모습을 봐라. 서로 어깨를 걸고 결연한 모습으로 킥을 지켜보는 포항의 선수들이 더 간절하고 든든해 보이지 않는가!!

또 하나의 변수는 포항 진영에서 승부차기가 진행됐다는 점이다. 포항 서포터스들은 마음껏 울산의 키커와 신경전으로 펼쳤고 연신 골키퍼 이준에게 파이팅을 불어 넣어 주었다. 아마 승부차기 토스에서 울산이 선축을 선택했고, 포항은 후축하는 대신 진영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선축팀에 유리하다는 승부차기지만, 뭔가 되는 날은 이것도 다 소용없다. 그냥 그 날의 분위기가 그랬다. 울산은 시종일관 무거웠고 쫒기는 모습이었다. 뭘해도 될 것만 같은 포항이 뭘해도 안될 것같은 울산을 누른 것이다.

한 명 한 명 킥을 할 때마다 옆에 있던 친구와 조마조마한 대화를 나눈다.

"임상협말고 1번 키커가 없잖아... (2, 3, 4, 5번이 불안해...)"
"권완규는 거의 위로 차는데... (불투이스처럼 홈런 날리면 어쩌나)"
"김성주... 와... 쟨 무조건 왼발로 강하게 찰텐데... (조현우에게 방향을 읽히면 어쩌나)"
"전민광. 슛은 쎈데 기술은 좀... 그냥 쎄게 차라... (기교 부리다가 빗나갈까봐)"
"강상우는... 킥은 좋은데 가슴이 참 여려... (행여 소녀슛 실수를 할까봐...)"

조현우는 역시 조현우다. 대부분 키커의 킥 방향을 읽었다. 그럼에도 우리 선수들의 자신감이 돋보였다. 모두 하나같이 잔머리를 쓰기 보다는 자신이 가장 정확하고 강하게 찰 수 있는 방향으로 때려 넣었다.

울산이 킥 할 때는 야유와 소음을 일으키고 우리가 킥 할 때는 음소거 상태를 유지하면서, 너무나 큰 부담을 겪고 있을 이준을 위해 남다른 파이팅을 넣어주면서, 우리는 그렇게 승부차기를 함께 치렀다!

경기 후 이준은 서포터스를 향해 매우 정중하게 여러 차례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뒤에서 줄곧 파이팅을 넣어준 서포터스가 고맙기도 했겠지만... 넘버 3 골키퍼로 벤치만 지키던 그가... 데뷔전에서 알까기 실수를 하며 극장골을 내주었던 그가... 아챔 준결승과 동해안 더비가 함께 걸린 큰 판에서, 약간은 실책성 실점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승부차기까지 치러야했던 그의 가슴은 얼마나 부담되고 두려웠을까 싶다.

경기 시간이 다른 누구보다도 길고 힘들었을텐데, 아마 그런 부담을 이겨낸 마음을 서포터스를 향해 표현한 것이 아닌가싶다. 서포터스의 에너지도 분명 큰 힘이 됐겠지만 결국은 이준 스스로 모든 부담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스스로에게 먼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같다.

잘~ 가세요!

이렇게 2021 시즌 동해안 더비는 1승 1무 2패. 요즘은 객관적인 전력이 앞서는 울산이 순위와 상대전적 모두 포항을 압도하고있다.

그럼 뭐 어때? 이렇게 큰 판이 걸린 경기에서, 온갖 쪼림과 희망고문이 뒤섞인 혈투에서 딱 한 번만 승리하면 기쁨은 천배 만배가 되는걸! 우리끼리 늘 이야기하지... "1년 내내 져도 된다. 울산이 가장 아픈 방법으로 딱 한 번만 이기면 된다!"

2021년 10월 20일, 우리는 이렇게 일년치 축구 행복을 단 한 경기로 아주 거만하게 즐길 수 있었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