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조광래는 위대했으니!

2011. 12. 23. 19:56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돌이켜보면 조광래 감독의 실패는 어느정도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도가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실험이었으니까요.
기대반 우려반이라고 하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기대 49% 우려 51%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기의 스타일과 이론으로 세계 축구와 맞짱 한 번 떠보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위대했습니다.
우리보다 강팀을 상대할 때, '상대가 제대로 못하게 하는 축구'를 구사하려하지 않고
'우리가 그들보다 잘하는 축구'를 추구한 그의 정신이야말로 조광래를 가장 잘 대변하지 않을까합니다.
장기적인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광래 감독의 생각이 맞을테지만
현실의 벽 때문에, 당장의 성적 때문에 그런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우리 나라가 아시아에서 중간쯤 되는 실력과 띄엄띄엄 월드컵에 얼굴 비치는 나라였다면
조광래가 추구하는 축구는 훨씬 해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 축구는... 더 큰 발전 보다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더 걱정해야하는 상황이니까요.

아마도, 지난 아시안컵 이후에 팀 빌딩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듯 합니다.
처음 부임했을 때, 그리고 아시안컵을 치르면서
어쩌면 조광래 감독은 대단한 자신감과 희망을 얻었을 것 같습니다.
유럽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즐비하고, 될성부른 어린 선수들도 눈에 띄고,
이런 선수들과 함께라면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듯 합니다.
"이런 선수들을 나의 손으로 빚어낸다면 정말 강팀이 되겠구나!"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순간!
아시안컵 이후 박지성과 이영표가 은퇴를 선언한 이 시점에
좀 더 과감하게 조광래 유치원을 꾸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떠났지만, 이청용 기성용 박주영 구자철 지동원 등이 건재하고...
여전히 손에 쥔 패가 너무나 좋았던 것이 오히려 조광래 감독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들과 함께 한 레벨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이청용의 부상, 박주영의 팀 이적과 후보신세, 자리잡지 못하는 구자철과 지동원.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왔고, 팀의 주축인 그들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차라리... 박주영, 이청용, 구자철, 지동원, 기성용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비록 그들이 방방 날아다닐 때에 비해서는 약한 팀일지 몰라도
조광래가 만들어 낸 팀은 그만의 색깔로 잘 훈련된, 말 그대로 조광래 유치원다운 팀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K-리그의 선수들로 탄탄한 조광래 팀을 만든 후에 유럽파 선수들이 합세를 한다면, 팀은 또 한 번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오히려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일본전에 패하고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불투명하게 만든 것이 잘못이 아니라
좋은 선수들의 유혹을 버리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안컵 직후의 팀 리빌딩 기회에서의 선택이 일본전의 결과와 지금 3차예선의 상황을 나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명보의 올림픽 팀을 보면 그런 아쉬움이 더 큽니다.
굵직한 선수들이 없었기 때문에 홍명보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조직력 위주의 팀을 만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기 내용에 답답함을 보였고, 때로는 어설픈 실점도 있었고, 마지막에 마무리짓지 못하는 약점도 노출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팀의 조직력과 끈끈함 만큼은 점점 단단해 졌습니다.
이렇게 단단해진 팀에 박주영 기성용 구자철 지동원 같은 선수가 가세를 하고
기존 선수들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홍명보 팀의 조직력에 동화된다면 정말 강한 팀이 되겠지요.

처음 손에 쥔 패가 너무 좋아서 강하게 베팅하던 조광래호는 뒤로 갈수록 패가 따라주지 않아서 주저앉은 반면
애초에 가진 패가 약했던 홍명보호는 그럭저럭 '콜'만 하면서 따라가다가 마지막 히든 카드를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것을 두고 실력이라면 실력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운이라면 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조광래는 똑똑하고 당찬 감독입니다.
그리고, 도전할 줄 아는 축구인이었습니다.
자기만의 축구로 세계 탑 클래스의 팀에 맞서 보겠다는 당찬 열정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맺기까지 기다려줄 수 없는 상황과 여론, 현실적인 결과물의 빈약함이 문제였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결과가 너무나 화창했던 봄날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네요.
차라리 조광래 부임 당시의 우리 축구가 조금 더 형편없었더라면
조광래의 1년 반은 훨씬 더 빛났을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조광래 감독이 좀 더 빨리, 좀 더 과감하게 유치원을 꾸렸으면하는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사람마다 운대가 맞는 시기와 상황이 있겠지요.
만약 조광래 감독이 청소년 대표팀을 맡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거구요.
홍명보와 조광래의 자리가 바뀌었다면 또 어떤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르는거구요.

한 능력있는 축구인이...
대표팀 감독을 겪으면서 무참하게 짓밟혀 버리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다시 재기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단련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과가 초라하다고 그의 축구가 초라한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가 추구한 축구는 위대한 도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발... 능력있는 축구인 한 명을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다시 일어서서 조광래의 축구를 끝내는 완성해 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