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명가 포항, 설기현, 그리고 동화되지 못했던 선수들

2011. 4. 24. 08:25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스틸야드에 온 설기현.
포항과 울산의 경기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모양입니다.
포항 팬들의 작심한 야유 퍼포먼스였을테고, 설기현으로서도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할 경기이기도 했겠지만...
설기현으로서도 울산으로 이적해야만 할 뭔가의 이유는 있었겠지요.
어쩌면 그에게도 포항 스틸러스는 끝까지 동화되기 힘든 팀이었을지도 모르고요.

전통의 명가...
저는 포항 스틸러스의 팬으로서 이 표현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성적에서도,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한껏 우리의 자부심을 채워주는 팀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렇지만, 한 편으로 '전통의 명가'라는 자부심 속에 숨어있는 가혹한 전통 또한 느낍니다.
전통의 명가 답게 포항은 많은 레전드들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전설의 선수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을 받습니다.
이회택, 조긍연, 황선홍, 홍명보, 박태하, 라데 같이 큰 족적을 남기고 은퇴한 선수들은 말 그대로 전설처럼 사랑 받지요.

전통의 명가... 그리고 레전드의 조건!
아예 포항 스틸러스에서 뼈를 묻은 선수들이나 데뷔를 포항과 함께 한 선수들은 몰라도
이미 다른 팀에서 전설에 버금가는 활약을 했던 선수들이 포항같은 팀에서 또 하나의 전설이 되기에는 가혹한 조건이 붙습니다.

포항을 위해 뼛속에서부터 헌신하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것!

포항에서 함께 했던 선수들 중에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해진 선수들이 몇 있습니다.
고정운, 안익수, 하석주, 김병지, 우성용, 설기현...
이 중에서 한때 포항의 주장이었던 하석주와 안익수를 제외하고는 포항의 역사에서 자랑스럽게 거론되는 선수는 없습니다.
다른 선수들에게... 포항은 하나의 지나가는 팀이었기 때문일겁니다.

포항은... 전통의 명가라는 자부심과 고집은...
선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포항과 운명을 같이하고, 포항이 그의 마지막 팀이기를 바라지요. (아니, 강요하지요)
설사 팀을 바꾸더라도 합당한, 충분히 공감갈만한 명분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포항 팬들의 마음속에서 그 선수의 이름에는 붉은줄이 그어집니다.

대표적으로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고정운과 안익수를 비교해 봅니다.
성남(일화)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선수들입니다.
고정운이 훨씬 유명한 선수였지만 포항 팬들에게는 안익수가 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포항에서 뛴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포항을 위해 몸이 부서질듯 뛰어주었고, 포항에서 멋지게 은퇴를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포항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도 그는 많은 포항의 올드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심지어 포항에서 은퇴 후 성남의 코치로 갔을 때, 그는 포항으로 다시 현역복귀할 것을 검토했을 정도니까요.

....

설기현은 졸지에 팀을 저버린 배신자가 됐습니다.
포항을 떠나서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그것도 좋지 않은 시기에 떠났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아마도 설기현이 포항의 전설같은 선수 중 한 사람으로 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Made in Pohang이 아닌 선수들 중에서 레전드급의 사랑을 받았던 안익수나 하석주 같은 선수들에 비하면
포항을 품은 그의 가슴이 그토록 뜨겁지는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포항에서 시작한 이동국은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데뷔하고 포항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이유로 지금도 사랑을 받습니다. 비록 다른 팀을 거쳐왔지만, 그의 선수생활을 포항에서 시작했던 김기동은 또 하나의 전설을 쓰고 있지요. 그뿐입니까? 포항의 감독이 되려면 외국인 출신이거나 포항 출신이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지요.

당찮은 자기 중심주의 일수도 있고 종갓집 꼬장같기도하지만
이게 포항 팬들이 가지는 전통으로서의 자부심이거든요.
실력과 성적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영혼까지 꺼내 놓기를 바라는 셈이지요.
당연히 타 팀에서 포항으로 이적하는 선수들에게는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정서지요.
그것도 이미 레전드급의 명성을 가진 선수들에게는 더욱 더 불리한...

포항 스틸러스... 그리고, 레전드급의 대형 선수들...
한 번 성립된 팬과 레전드의 관계는 무덤까지 함께가는 끈끈한 우정이 되기도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름에 붉은줄을 남기는 가혹한 불명예가 될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연봉 때문에 포항을 택하지 마세요.
사람이나 인정 때문에 포항을 택하지 마세요.
우승이나 성적을 위해 포항을 택하지도 마세요.
떠밀리듯 포항에 오는 것은 더더욱 안됩니다.
그 밖에도 포항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팀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포항이 당신의 마지막 팀이기를 바란다면, 그 때는 포항을 택해도 괜찮을겁니다.
환영받고 사랑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당신이 포항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기꺼이 환송연을 베풀어 줄 것입니다.

조금은 가혹하고 아니꼬운...
마치 시집온 며느리에게 "너는 이제 포씨 가문의 사람이니, 모든 것을 버리고 포씨가 되어라!"라는 부담백배를 느끼게하는 시어머니의 일갈처럼 들리겠지만...
이게 포항 팬들이 바라는 자존심이고 현실적인 정서입니다.

남들에게는 웃기고 같잖아 보일지 모르지만...
선수 당사자에게는 더욱 꼴같지 않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
포항은 그렇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