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강길웅 신부)

2006. 11. 27. 17:50사는게 뭐길래/볼거리먹거리놀거리


저희 집은 천주교 집안입니다.
어머니 아버니께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시며
형님 내외분과 아이들 둘도 모두 천주교 신자입니다.
누나는 결혼을 하면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누님 댁은 시부모님을 포함해서 모두 기독교 신자지요)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살짜리 제 아들놈도 어엿한 세례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성당에 갈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천주교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시고
여러 차례 직접 권유도 하셨지만 말입니다.

항상 제가 가져다 붙이는 궁색한 변명은...

"그럼,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두 성당에 가면 집은 누가 보라고..."

....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부모님 댁에 갔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아들놈을 키워 주시기 때문에 주말마다 부모님 댁에 갑니다.)

가뜩이나 밤잠이 없는 터에 초저녁에 잠시 눈을 붙였더니
밤이 늦도록 제대로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차에...

잠을 청할겸 해서 책꽃이에 있는 책 몇 권을 뒤져 보았습니다.
역시나...
천주교 신자이신 두 분 답게 성경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천주교 관련 책들과
성당 회보들은 눈에 띄지만
제가 잠을 청하기에 적당한 소설이나 에세이, 만화, 무협 따위의 책은 보이지가 않더군요.

그러던 중...
한 권의 책이 눈에 띄더군요.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지은이는 강길웅 신부라고 되어 있었고, 출판사 또한 '생활성서사'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 역시 천주교 관련 책이란 것은 뻔한데...

마침 손에 잡힐만한 책도 없었던 터에 제목까지 워낙 독특해서 그 책을 뽑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이 좀 얇은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책없이 잠이 안올 때 1,2,3,4권 이어지는 무협소설이라도 잡게 되면
오히려 밤을 꼴딱 새게 되지요... ^^)

.....

뭔 세상에 이런 신부님이 다 있담?

보통 신부님이 쓴 책이라면 고상하고 점잖게 삶의 훈수 몇 마디가 나와야 하는데...
수 없이 등장하는 술 마시고 사고친 이야기, 남에게 거짓말한 이야기, 구구절절한 자기의 잘못들...
그리고, 또한 수 없이 되풀이되는 술을 정말 끊어야한다는 이야기들...

도대체 어찌 된 신부님이...
제가 보기에 신자들의 고해를 받고 용서를 해 주는 것 보다도
이 신부님은 자신의 일을 고해하기에도 벅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용을 보아하니 그냥 자기 겉치레 삼아 스스로 못났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실제로 얼렁뚱땅 거칠고 투박하게 살아온 그분의 인생 그대로가 담겨있는
자전적인 에세이였습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고, 10년이 넘게 교직 생활을 한 후에, 광부 생활도 좀 하고,
나이 서른이 넘어서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게되었으니
신부님의 인생 또한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 하진 않더군요. ^_^

.....

때로는...
감추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더 빛나고
가진 것이 적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부끄러운 것에 솔직하기 때문에 더 떳떳하고
정돈된 설교가 아니라서 더 마음을 뺏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과 함께 표지 사진이라도 함께 넣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이 된 모양인지 yes24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더군요.

가끔은...
전혀 나의 관심 밖에 있는... 책꽃이 속의 묵은 책을 한 권 꺼내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실실 웃으면서 기분 좋은 잠을 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