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weto, 아프리카의 마지막 풍경

2010. 7. 5. 22:02월드컵 여행 - 2010 남아공/8. 요하네스버그

[7월 4일]

요하네스버그 외곽의 소웨토(SOWETO) 지역에 투어를 다녀왔습니다.
귀국(7월 6일)까지 이틀 정도 일정이 남아서 당초에는 크루거 국립공원 1박 2일 투어를 다녀올까 했는데, 크루커 투어는 최소 2박 3일부터 시작한다는군요.
그래서, 그냥 숙소에서 시간을 때울까 하다가 마침 시티투어를 찾고 있던 프랑스 커플이 있어서 함께하게 됐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인데 지금 중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더군요.)

처음 들른 곳은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표를 사서 입구로 가면, "백인은 왼쪽으로 가세요." "유색인은 오른쪽으로 가세요" 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백인과 유색인을 나누는 것은 아니고 말만 그렇게 합니다.
인종 분리 정책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요.
(실제로는 백인 보고 유색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유색인 보고 백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전시물 보다는 영상물과 사진, 기록 위주로 되어 있는 박물관입니다.
특히 넬슨 만델라에 대한 영상과 기록물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가히 넬슨 만델라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이것만 봐도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와도 같습니다.
남아공의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신분증

설치물 속의 사람들은 모두 실제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된 역사속의 인물 또는 그들의 후손들입니다.



박물관에서 재미있는 것을 봤습니다.

"유색인과 백인을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 축구를 좋아하면 유색인, 럭비를 좋아하면 백인!"

관람객 모두 한 번씩 썩소를 날리며 지나갔습니다.
웃으면서 볼 수 있었지만, 이게 실제로 케이프타운의 신문에 실렸던 내용이라니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얼마나 무모하고 반인권적인 것인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지요.

지금도 축구는 주로 흑인들이 좋아하고, 백인들은 럭비나 크리켓을 좋아합니다.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관람 후에 본격적으로 소웨토 투어!

소웨토 투어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 요하네스버그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
두울,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남아공 흑인 인권운동 역사의 심장부를 본다.

소웨토 입구 (여기서는 소웨토에서도 쫌 사는 사람들 동네라네요. 소웨토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심하답니다.)

운전기사겸 가이드가 차로 이동하면서 계속 설명을 하고, 중간중간 내려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잭이라는 친구는 자기를 소웨토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소웨토를 보지 않고 남아공을 떠난다면 돈만 쓰고 간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소웨토는 남아공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간직한 곳이에요."

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백인과 흑인 사이의 벽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큰 돈을 만지고 큰 돈을 버는 사람들은 백인들이고 흑인들은 대부분 백인 회사의 직원이나 백인 가정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월드컵 때 돈 쫌 벌었어요?"
"벌기야했지요. 그렇지만 생각처럼 많지는 않아요."
"택시 운전하는 사람이 그러는데, 돈 버는 재미에 밤에 잠도 안온다던데?"
"택시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요하네스버그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외국인들이 생각처럼 많이 오지 않았고,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들도 백인들이 운영하는 큰 투어 회사, 큰 투어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비싼데도 말이죠."

관광객들을 좀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만 해도 소웨토쪽 게스트 하우스를 알아 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인들이 주로 살고있는 샌톤(Sandton) 지역의 호텔에 묵었거든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저 역시 모든 남아공의 흑인들을 색안경 낀 채로 봤었다는 사실이 조금 미안했습니다.

소웨토 가이드. 투어 마치고 돌아올 때, 완전 다방 삘 나는 아가씨 두명 태워서 바래다 주더라구요... ^_^

소웨토는 요하네스버그의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거지역입니다.
요하네스버그의 흑인들을 외곽으로 몰아내면서 만든 집단 주거지역인데, 지금은 이곳 소웨토에도 빈부의 차가 많이 나타난다고 하네요.
실제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고급 주택, 한쪽은 판자집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소웨토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외곽쪽)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고, 마을 군데군데 이동식 화장실, 아이들 대부분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으며, 부모들도 대부분 실직자입니다.
적당히 벽을 치고 함석 지붕을 얹은 집. (Match Box, 즉 성냥갑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아이들도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복을 살 돈이 없어요. 교복을 입은 아이와 입지 않은 아이로 또 구별이되고, 교복을 반드시 입어야하는 학교도 있고... 단지 교복 때문에..."
...
"저기 연기 피어오르는거 보이나요? 전기나 가스를 쓸 수 없고, 기름은 돈이 드니까 나무나 쓰레기로 불을 피워서 밥을 지어야 하거든요."
 

소웨토 빈민가. 당연히 무허가 주택들... 전기 X, 물 X, 가스 X.

어디는 공터만 있으면 축구를 하는 아프리카 사람들. 이런 모습을 케냐부터 계속 봤습니다.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기본적인 삶의 터전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맑은 눈동자를 가진 소웨토의 아이들이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장미는 핀다고들 말하지만, 조금만 더 좋은 토양에 조금만 더 물을 주어도 싱그럽고 아름다운 장미들이 쑥쑥 자랄텐데 말입니다.
남아공 정부에서도 빈민들을 위한 정책을 꾸준히 펴고 있다니 조금씩 더 나은 환경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정부에서 지어준 엘리펀트 하우스. 지붕 모양이 코끼리 등을 닮았지요?



소웨토 일대를 한 바퀴 둘러 본 후에는 소웨토의 상징이자 자부심, 남아공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의 흔적을 찾아갑니다.

소웨토의 VILAKAZI Street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투투 주교와 넬슨 만델라의 집이 모두 이 거리에 있거든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 거리에서 두 명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탄생한 곳!
역설적으로... 소웨토 지역이 그만큼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고, 치열한 흑인인권 투쟁이 있었던 곳이라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니,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큰 존재인지 알 수 있겠죠?

마을의 길 모퉁이에도 넬슨 만델라!

넬슨 만델라 하우스는 현재 작은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그냥 소웨토의 여느 집들과 다름 없는 평범한 집을 박물관으로 다시 꾸몄을 뿐입니다.
특별한 것이 있는 곳이 아니라, 넬슨 만델라가 살았던 집!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지요.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넬슨 만델라가 돌아온 곳, 그리고 27년간 옥바라지를 했던 위니 만델라가 살았던 집이기 때문입니다.
(만델라 석방 후 위니 만델라와 이혼. 그리고, 이혼 2년 후 만델라는 남아공의 대통령이 됩니다. 위니 만델라는 지금도 소웨토에 살고 있습니다.)
 

넬슨 만델라 하우스. 8115 Vilakazi St., Orlando West, Soweto.

넬슨 만델라 하우스 앞이 완전 인산인해!
경찰들 쫙 깔리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방송 취재진들까지 북적부적...
자세히 보니 많은 사람들이 가나팀의 레플리카, 머플러, 가나 국기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운 좋게도... 저희가 소웨토를 방문한 때에 마침 가나 대표팀도 소웨토를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남아공에서 가나의 인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비록 8강에서 너무나 아깝게 탈락하긴 했지만, 남아공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들의 가나에 대한 자부심은 정말 엄청납니다.
저희도 투어를 잠시 멈추고 그곳에서 가나 팀을 열렬히 환영하는데 잠시 동참 ^^
 

넬슨 만델라 하우스, 인산인해! 하지만 오늘은 넬슨 만델라 보다 가타 대표팀이 더 사랑받는 날^^

많은 남아공 사람들이 연장 막판에 페널티 킥을 실축한 기안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기안이 잠시 버스 출입문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너무나도 아쉬운 실수이지만 그것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나팀 버스에 쓰여있듯이, 그들은 이번 월드컵에서 아프리카의 희망이었습니다!

가나팀 버스 주변에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아예 버스를 세워 놓고 한 참을 있었습니다.



넬슨 만델라 하우스 방문 후에 들른 곳은 헥터 피터슨 박물관!
헥터 피터슨(Hector Peterson)은 백인 학생들과의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흑인 학생들의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숨진 어린이의 이름입니다.

숨진 그의 시신을 안고 있는 사진이 지역 신문을 통해 남아공 전체, 그리고 전 세계로 알려지면서 대대적인 흑인 인권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었던 6월 16일은 우리나라의 4.19와 같은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헥터 피터슨 박물관 표지석 (표지석의 글은 넬슨 만델라가 헌정)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1976년 학생시위 당시에 숨진 어린이와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진 전시물이었습니다.
인권운동가도 아니고 투쟁가도 아닌 아이들인데 말입니다.
전시관 바닥에 흩뿌려진 그들 하나 하나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돌들...
저도 아이를 키우는 아빠이기 때문인지 살짝 눈물이 고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흩뿌려진 작은 벽돌같은 것들이 모두 아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입니다.

남아공과 우리나라의 인권운동 역사에 닮은 점이 많습니다.
6.16-4.19, 헥터 피터슨-김주열, 만델라-김대중 ...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한 과정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인권과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친 남아공이기에 한국인인 저의 눈에는 그들이 지금 걸어가는 자유와 평등을 향한 발걸음에 존경을 표할 수 밖에 없고, 또한 그들의 위대한 노력이 언젠가는 찬란하게 빛나는 남아공을 만들거라 생각합니다.

...

솔직히 그냥 별 생각없이 하루를 때우기 위해 나선 투어였습니다.
실제로 하루를 잘 때웠고요.

하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실상 남아공과 조벅,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마지막 날이나 마찬가지인데...
남아공 사람들의 눈물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네요.

저의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아공은 범죄와 치안부재의 나라가 아닙니다.

위대한 인권 혁명의 나라이고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이제 남아공을 떠나면 언제 다시 남아공에, 아프리카에 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인생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제 얼굴이 검게 그을린만큼, 더 가깝게 남아공과 아프리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꼭 다시 한 번 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