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의 축구는 실험이 아니라 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1. 9. 9. 22:14축구가 뭐길래/Steelers & Reds


축구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보겠습니다.

- 상대팀 보다 잘한다
- 상대팀을 못하게 만든다

우스워 보이지만, 어쩌면 이 두 가지 맥락에서 축구팀의 철학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상당히 극단적으로 양분한 것이지요. ^^)

예를 들어, 2011 K-리그 1-2위를 달리고 있는 포항과 전북의 경기를 생각해 보지요.
두 팀 모두 상대보다 잘 하기 위해서 뛸 것입니다.
자기팀의 플레이를 최대한 잘 해낸다면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올 시즌 초반의 포항과 부산 경기라면?
2011 시즌 초반의 부산은 어떻게 해서든 승점 1점이라도 따내는 것이 급한 팀이었습니다.
전력 우위에 있는 포항은 부산보다 잘하기 위해서, 자기팀의 플레이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부산의 입장에서는 포항이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비단 포항을 상대할 때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팀과 맞서서 최소한의 승점을 따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죠.
부산이 승점이나 순위 경쟁과 상관없이, "경기에 지더라도 우리만의 플레이를 완성할꺼야!"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부산의 그러한 전략은 객관적인 예측을 깨고 상당부분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며
급기야 현재 플레이 오프를 노릴 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1등을 할 수도 있지만
1등 하는 놈 공부 못하게 해서 1등을 할 수도 있거든요. ^_^
.....

자, 그러면!
우리의 국가대표팀을 살펴봅니다.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 같은 큰 무대에 나설 때 취하는 전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시아권에서야 우리만 잘하면 먹혀주지만, 우리보다 강팀을 만났을 경우에
우리팀은 여지 없이 '상대가 제 플레이를 못하게 하는' 축구를 구사했습니다.
2002년 히딩크의 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루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들보다 전력 우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날 그 경기만큼은 그들이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더 큰 힘이었지요.

그러면, 지난 남아공 월드컵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전반전을 1대2로 뒤진 상황에서 맞이한 아르헨티나와의 후반전.
허정무는 후반 초반에 의외로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했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아르헨티나를 못살게 구는 축구가 아니라, 우리가 잘하는 축구를 구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우리의 플레이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아르헨티나를 당해낼 수 없었고
다소 치욕적인 골들을 연달아 먹으면서 무너졌지요.

바로 이 부분인데...
역시나 우리보다 강한 팀을 상대로 할 때는 우리의 플레이를 잘하는 것 보다는
일단 상대방이 자기들의 플레이를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잘먹히고
반대로 우리만의 플레이로 골을 더 넣겠다고 덤빌 때는 그 만큼의 위험 부담도 있다는 말입니다.

...

조광래호의 축구.
아마도 조광래는 우리보다 잘하는 놈을 못살게 해서 이기는 축구가 아닌,
우리가 상대보다 더 잘해서 이기는 축구를 추구하는 듯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월드컵에서 우리가 유럽이나 남미의 팀들과 겨루면서
우리가 그들보다 잘해서 이기는 것이 어렵다고 볼 수도 있긴하지만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서 보았듯이, 그 전력차가 그리 크게 벌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남아공 월드컵을 마치자 마자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으니
중간에 잘리지만 않는다면 비교적 긴 시간이 주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그 정도의 시간이면 한 번 도전해 볼만 하다고 판단을 내렸겠지요.
게다가 타협을 거부하는 그의 스타일을 생각해 보면
당장의 승리를 위해서 큰 틀의 전략을 포기할 사람도 아니구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대표팀은 한국 축구가 큰 틀에서 변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열쇠를 쥔
전환기의 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미 그런 변화는 조광래 감독의 부임과 함께 시작되었고, 타협 없는 전진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은 감독이 추구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황
그러다보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생기는 불균형이 나타나고
최근의 경기 결과를 보더라도 한일전 0대3 패배, 레바논 6대0 승, 쿠웨이트 1대1 졸전...
잘할 땐 엄청 빛나고 못할 때는 완전 쪼그라드는 롤러코스터 경기력.

....

일본 축구와 한국 축구가 걸어온 길은 달랐습니다.
일본이 '우리가 너희 보다 잘할거야!'라는 길을 걸어 왔다면
우리는 '너희들 우리랑 할 때는 그렇게 못하게 할테야!'라는 길을 걸어왔고
큰 대회에서는 우리의 방식이 상당히 먹혔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우위, 한국 승'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일본이 우리보다 축구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요.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차근차근 성장을 했고, 오히려 전체적인 수준에서는 한국보다 더 잘하는 수준까지 왔습니다.

경기에서의 전술은 감독의 몫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감독의 전술이 이렇다 저렇다 지적하고 평가를 해도
당사자 만큼 세밀하고 지독하게 이해하지는 못할것이고
우리의 알량한 관전평이라는 것도 주변인의 눈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감독의 수준이 영 아니올시다라면 모르지만... 조광래 감독이 그 수준 보다는 헐 높지요!)

그렇다면, 대표팀의 전략은 누구의 몫일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 대표팀이 앞으로 추구할 스타일이나 한국 축구의 방향성은 누구의 몫일까...
이것은 감독의 몫이 아니라 축구협회, 그리고 축구 팬들의 몫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축구를 원하는 걸까요?
어떤 축구를 추구하는 감독을 원하는 걸까요?

상대팀이 못하게 만들어서 이기는 쪽에 방점이 찍힌다면 조광래 감독은 아닙니다.
짧은 시간안에 그런 팀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
당장 우리보다 강한 팀들과 대적해야 하는 큰 대회에서는 그 빛을 보기가 쉽지 않겠지요.
우리의 실력이 먹힐 때는 방방 날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액면에 깔린 패 그대로 깨지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더 나은 실력으로... 현재는 우리보다 강한 팀이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가지고자 한다면 조광래 감독은 현명한 선택일겁니다.
그 댓가로 상당기간 동안 들쑥날쑥하는 전력에 가슴을 쓸어 내려야할테고
그러면서도 1~2년 뒤에 우리가 유럽이나 남미의 강팀들과 대등한, 또는 능가하는 팀이 될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전력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다시 또 몇 년을 같은 방식으로 투자해야겠지요.

....

우리의 정서, 우리의 문화...
상대팀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서라도 지금 당장 우리의 승리 확률이 더 높아지는 쪽이지요.
몇 년 후의 대표팀 전력이 아닌, 지금 당장의 성적이 중요하지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A-대표팀도 몇년 후의 전력상승이 아닌 현재의 성적을 위한 최적의 팀을 꾸리니까요.
몇 년 후의 전력상승은 협회가 유소년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할 일이지 현재 대표팀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저는 조광래 감독의 당돌한 시도 또한 밀어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쿠웨이트 전 졸전에 대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전술적인 유연성 보다는 나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던 그...
잘 될지 어떨지 걱정과 불안이 많이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번 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월드컵 16강을 목표로 한다' 내지는 '8강을 목표로 한다'라는 성적 의존적인 목표가 아니라...
'세계 16위 수준의 팀을 만들겠다', '세계 8위 수준의 팀을 만들겠다'라는 질적인 완성을 목표로 하는 감독과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축구와 문화에 잘 맞지 않는 목표입니다.
선수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축구겠지요.
진짜 만화 같은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도 꽤 큽니다.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적임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에는 불안한 시선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당돌하고 당당한 도전장을 내미는 감독...
뻥쟁이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믿고 그렇기 하기 위해서 진짜로 노력하는...
그럴 의지가 확고한 감독이라면
비록 그 결과가 우리에게 아픔이 될지라도
결국은 우리 축구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안 가던 길을 한 번 가 보는거지요.
걱정도 되고, 썩 내키지도 않고, 주변에서 다들 말리지만...
결국 배낭 메고 떠나는거지요!

돌아오면 뭔가 성장한 모습이겠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