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중국속의 작은 K-리그, 조선족 조기축구리그

2006. 5. 29. 09:50월드컵 여행 - 2006, 독일까지 유라시아횡단/4.베이징(중국)


5월 27일, 여행 4일째.

전날은 비가 왔는데, 마침 비도 그쳤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상쾌한 날씨였습니다.
자금성을 볼까, 이화원을 볼까...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송청운님의 안내를 받아 조선족 조기축구팀이 참여하는
주말 리그를 보러 갔습니다.

베이징 중앙미술대학의 인조잔디 구장에서는 이미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출전팀은 호유팀과 금영팀!
스탠드에는 경기에 뛰지 않는 선수들과 가족들까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하기 좀 그렇지만... K-리그의 관중없는 경기에서 관중수와 비슷할거 같네요... 쩝!)


송청운님이 소개해 준 조선족 팀은 호유(好友)팀으로
전날 저녁에 조선족 대학생, 중국 치우미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몽빠(Dream-Bar)의
장철수 사장이 뛰는 팀이기도 합니다.

금영팀도 조선족 팀인데, 노래방 반주기로 유명한 금영이라는 회사에서
후원을 하는 팀이라고 합니다.
(우와~ 조기회 축구팀도 기업의 후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베이징 주말 조기축구 리그에 조선족으로 구성된 호유팀이 참가하는 줄 알았는데
리그 자체가 조선족 조기회 리그랍니다.
그리고, 리그를 구성하는 10개팀 모두가 조선족 조기축구 팀이라는군요.
더 놀라운 것은 리그에 참여하지 않는 조선족 조기축구 팀까지 합치면
20개 팀도 넘는답니다.
중국 프로리그에서 은퇴한 선수들도 몇 명이 리그에서 뛰고 있답니다.
그 중에는 중국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도 있고요.

베이징 속에 순수 아마추어들이 뛰는 작는 K-리그가 있다면 과장일지 몰라도
10개 팀이 매주 토요일에 리그 경기를 치른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그 팀 모두가 조선족 팀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지요.
(여러분, 자부심을 가지세요. K-리그가 어떻다느니 축구협회가 어떻다느니 하지만
한국사람처럼 축구를 즐기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그게 한국 축구의 원동력입니다.)

경기는 호유팀이 금영팀을 압도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호유팀이 2대1로 앞서는 상황에서 전반전을 마쳤습니다.


리드를 하고 있는 호유팀은 비교적 분위기가 차분하고
서로서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격려하면서
담배까지 한 모금 마시며 휴식을 취합니다.


개중에는 경기중에 부상을 당한 선수도 있지만
조기회에서 이 정도 부상은 영광의 상처일 뿐이지요.
더구나 팀이 리드를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반면에 지고 있는 금영팀은 분위기가 좀 무겁습니다.
경기 내용에서도 다소 밀리는 양상이었고 스코어도 1대2로 뒤지는 상황.
언뜻 보기에 호유팀에 비해서 선수 자원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주장으로 보이는 분이 경기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좀 더 파이팅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심판들도 잠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경기 내내 보았는데 심판의 판정에 대해서는 절대 복종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경기 내용면에서야 제대로 된 선수들이 뛰는 아마추어 경기나
프로 경기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리그를 운영하는 방식이나
경기에 임하는 모습은 매우 신선했습니다.
심지어... 터치라인에는 경기중에 선수들이 마실 물병까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

터치라인에는 물병도 비치되어 있습니다.



후반전 시작하면서 금영팀이 맹 추격을 시작했지만
오히려 호유팀의 역습에 의해 연속 실점을 하면서
경기 스코어는 순식간에 4대1까지 벌어지고 맙니다.
제가 보기에 호유팀의 선수 멤버가 좋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발을 맞춘 것처럼
선수들 사이에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상대팀보다 훨씬 쉽게 경기를 했고, 중요한 역습 상황에는
빠른 패스웍으로 순식간에 상대 문전에 도달하는 수준 높은 플레이를 했습니다.


슬슬... 경기 내용 보다는 경기 외적인 것들에 눈이 가더군요.
그러던 중에 터치라인 근처에 삐딱한 네로 황제 자세로 누워있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누굴까?
그냥 노는 사람 같지는 않고... 혹시 대기심?


역시나! 교체 선수가 등장하자 뭔가 종이를 뒤적거리더니
경기 내내 누워서 지대던 네로 황제 자세를 고치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리고, 주심에 선수 교체를 알립니다.
(개 팔자 상 팔자 --> 대김 팔자 상 팔자)

가까이가서 대기심이 끄적 거리던 종이를 보았습니다.
저를 한 번 더 놀라게 하는군요.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 명단과 경기에서의 득점 및 선수교체 기록 등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심... 누워 지내긴 했지만 그냥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대기심으로 해야할 본연의 임무는 다 하고 있었습니다. ^^)


경기는 종료 직전에 금영팀이 멋진 헤딩 골을 터뜨리며 분전했지만
최종 스코어 5대2로 호유팀의 압승!호유팀 선수들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을 하고
승리의 달콤함이 묻어나는 담배를 맛깔나게 피웁니다.

유니폼 웃옷을 위로 걷어 올리고
경기장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피우는 담배 한 모금...
축구 동호회 100배 즐기기의 진수 아니겠습니까?



경기가 끝나자 심판진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떠납니다.

이 심판들은 베이징 체육대학의 학생들이랍니다.
리그에서 약간의 돈을 받는 리그 전임 심판이랍니다.
작은 돈이지만 학생들에게는 아르바이트 비용 정도가 되는 것이고
또한 심판으로서의 경험도 쌓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리그에 참가하는 팀의 입장에서도 전임 심판을 둔다는 것만으로도
경기의 질과 공평함을 보장 받을 수 있으니 좋은 것이고요.


이렇게 경기는 끝나고...

경기 내내 열심히 뛰었던 아빠는
열심히 아빠를 응원하면서 토요일 오후를 즐겁게 보냈던 딸의 손을 잡고
경기장을 나갑니다.

"오늘 아빠가 한 골 넣었단다"


아빠가 위에 걸친 운동복에 삘이 딱 옵니다.
저거... 왠지 중국 국가대표팀의 트레닝 복 같은걸?



그렇습니다.
왕년에 중국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던 리홍군 선수입니다.
아쉽지만...
리홍군 선수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뛴 마지막 조선족 선수입니다.
현재 청소년팀이나 올림픽팀에는 조선족 선수가 몇 명 있다고 하는군요.
그의 후배 조선족 선수들이 다시 중국 최고의 선수로 커주기를 기원합니다.

경기를  마치고 식당으로 이동!


이제 한 잔의 맥주를 마시고, 푸짐한 안주를 앞에 놓고
오늘의 무용담과 축구팀의 현황과 미래, 조선족 사회의 현안, 통일과 남북문제,
국내외 정세, 팀원들 간의 가족 대소사, 2006 독일 월드컵에 대한 전망,
한국 축구와 중국 축구의 현황과 문제점, 평양 냉면과 함흥 냉면의 차이...
기타 등등에 대해서 종합적인 이야기판이 벌어집니다.
(언제나... 남자 셋 이상이 모이면 그렇죠. ^^)


식사를 주문하고 맥주잔이 오가는 어수선한 상황이지만
총무는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우선적으로 회비 납부 상황을 체크합니다.
(잘 나가는 동호회는 인심 후하고 사람 좋은 든든한 회장겸 후견인, 그리고
발빠르게 대소사를 챙기는 총무가 힘의 원천 아닙니까?)

.....

호유팀은 현재 조선족 조기회 리그에서 3위를 달리고 있는 강팀입니다.
그러나, 호유팀이 정말 자랑하는 것은 승리의 기록이나 리그 성적이 아닌
회원들간의 끈끈한 유대와 신뢰라고 합니다.
바로 팀 이름인 호유(好友)가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호유팀은 조선족 축구팀 중에서도 회원들 간의 결속이 가장 강한 팀이랍니다.
오늘 경기를 뛴 선수 중 한 명은, 토요일 오후 리그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
항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정도니까요.

축구는...
지금 이 순간 중국 베이징에서 살고 있는 모든 조선족 동포들을 묶어주는
또 하나의 네트웍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호유팀뿐만 아니라, 금영팀을 비롯한 다른 모든 조선족 축구팀들에게
오늘은 즐겁고 유쾌하게 동포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민족(民族)'이라는 말은 우리 나라만 쓰는 단어랍니다.
같은 핏줄과 문화, 역사를 나누는 우리들을 묶어 주기에
'국가'나 '국적'이라는 말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물었습니다.

"조선족이 한족보다 축구를 잘하는 이유가 있나요?"

호유팀의 선수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릴때부터 한족 아이들은 농구를 하고, 우리는 축구만 했습니다."
"조선 사람은 악이 있습니다. 끝까지 하는 악이 있습니다."
"축구는... 힘들다고 쉴 수가 없지요. 조선 사람은 끝까지 참고 하잖습니까?"

...

글쎄요, 답이 뭘까요?

얼마전 일본 고교 축구 대회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4강까지 올랐던
오사카 조선고등학교 축구팀 기억하세요?
그 팀의 응원 플랙에 그 답이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원래 축구를 잘해 -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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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래 축구를 잘하는 민족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