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센키르셴] 잉글랜드, 가장 아름다운 퇴장을 보았습니다.

2006. 7. 2. 23:48월드컵 여행 - 2006 독일/13.겔센키르셴

7월 1일.
이변이 연속된 날이기도 하고...
반대로 말하면 이번 월드컵도 이제는 진짜 파장이 되는 분위기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킨 날입니다 ^^

월드컵을 주도하고 팬 문화를 주도하는 나라는 세 나라인 것 같습니다.
첫째, 개최국 (독일)
둘째, 축구의 종주국 영국
셋째,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자 브라질

그런데... 브라질과 잉글랜드가 같은날 고꾸라졌으니
이제 월드컵의 남은 기간은 독일의 축제가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확실히 다릅니다.
저는 잉글랜드:포루투갈 경기를 보았는데
잉글랜드가 지면서 불과 몇 시간만에 몰라보게 분위기가 가라앉더군요.

저와 정훈이, 그리고 겔센키르셴에서 다시 만난 우용팀까지 어울려서
꽤 늦게까지 거리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겔센키르셴에서 20분 정도 거리인 에센(Essen)에 숙소를 잡았는데
경기전에 겔센키르셴으로 가는 기차에서 엄청난 수의 잉글랜드 팬들을 보았습니다.
주말 경기를 맞아서 8만명의 잉글랜드 팬들이 독일로 왔답니다.
겔센키르셴은 작은 도시라서 인근 도시까지 온통 잉글랜드 물결이었죠.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에센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잉글랜드 팬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축제가 끝났고... 덩달아서 월드컵도 그 열기가 한 풀 꺾였다는 것이
바로 느껴지더군요.

개최국이 선전을 하지 않으면 흥행이 안될 것이고
잉글랜드가 선전을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브라질이 선전을 하지 않으면 화려한 볼거리가 없고....

잉글랜드와 포루투갈의 경기를 보면서
또 다른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잉글랜드 경기를 보긴 했지만 그 때는 모두 잉글랜드가 이기는 경기였지만
이번에는 잉글랜드가 패하는 경기를 본 것이 더 신선했습니다.

뭐랄까...
여전히 축구 종주국의 선수와 팬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도 될만큼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있어서 축구는 경건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팬과 선수들이 서로를 존중한다는 것이 나타나더군요.

개지랄을 떠는 훌리건 양아치들도 많고, 대부분의 사고는 잉글랜드 팬들이 끼면서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고, 끊임 없이 술을 마셔대면서 주접을 떠는 것도 그들이고,
쓰레빠에 반바지에 웃통 벗어제끼고 온몸에 문신을 그득하게 새겨넣은
부랑아가 같은 모습을 한 남자들이 득실득실 거리지만...
부인할 수 없는 축구 종주국의 품위 또한 가진 그들이었습니다.

그럼....
각설하고!

사진과 함께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

에센의 숙소에서 길을 나서다가, 우연히 포루투갈 선수단 버스를 만났습니다.
저희는 몰랐는데, 포루투갈 선수들이 에센의 셰라톤 호텔에 묵었던 모양입니다.
아래의 정훈이 사진은 광고판이 아니라 진짜 포루투갈 선수단 버스 앞에서 찍은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왕 팬인 정훈이에게... 이게 불길한 전주곡이었다는.... 쩝!)



내친김에 셰라톤 호텔앞에서 좀 진을 치고 있었더니
포루투갈 선수들이 버스에 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선수들도 경기장으로 출발하고... 우리도 출발해야죠?

누가 이눔아들 이름 좀 아는 사람?



겔센키르셴...
이미 잉글랜드 팬들이 점령했습니다.
8만명이 건너왔고, 3만명이 경기장에 들어간답니다.
작은 도시의 지하철로는 수 많은 잉글랜드 무리를 수용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


겔센키르셴의 경기장은 돔 구장입니다.
천으로 된 개폐식 지붕이라고 합니다.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빛이 들어오고...
그렇기 때문에 어둡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제가 자리를 잡은 곳은 골대 뒤쪽의 맨 윗자리 (천정 바로 아래 ^^)
지난번에 브라질 경기는 맨 앞자리에서 보더니, 이번에는 맨 뒷자리를 경험했습니다.

덕분에 잉글랜드 서포터의 응원에 박자와 가락을 넣어 주는
브라스 밴드를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고용한 사람들로 , A-매치마타 따라 다닌다는군요.)

경기 내용과 관중석 분위기를 살펴가면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어찌나 절묘하게 타이밍을 잡고, 또 그에 적절한 응원곡을 연주하는지...
수 많은 잉글랜드 팬들이 자연스럽게 하나처럼 응원가를 부르더군요.
자기들이 먼저 박자를 넣으면서 리드하기도 하고
반대로 서포터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거기에 맞춰서 반주를 넣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큰 소리로, 때로는 작은 소리로... 분위기 착착 맞추면서 하더군요.

음악의 힘이 참 대단하죠?
서포터들의 성격상 과격하고 거칠어 지기가 아주 쉬운데
몇 명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에 순한 양처럼 일사분란하게 정돈이 되더군요.
(야유를 하고 심판 욕을 하다가도, 브라스 밴드의 박자는 놓지지 않습니다. ^^)


경기장 분위기요?
안봐도 뻔하죠.... 그냥 잉글랜드의 어느 한 도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



경기 내내 압도적인 관중들의 응원을 등에 업었지만
베컴이 교체 아웃되고, 루니가 퇴장당하고...
잉글랜드에게 불행한 일들만 계속 생기더니...
결국은 승부차기까지 가고 맙니다.

제 자리보다 약간 앞에 잉글랜드 아저씨가 있었는데
"걱정하지마, 잉글랜드가 이길거야!"
라면서 경기 내내 여유있는 웃음과 맘 좋은 미소로
주변의 사람들을 다독거리며 이야기해 주던 아저씨...

그러나, 승부차기가 벌어지자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뒤돌아 섭니다.
(사진을 찍고 있긴 했지만... 보는 제가 얼마나 그 모습이 안타까운지...
축구장에서 승부차기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마 그 아저씨의 마음을 알거에요...)

손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성공을 하면 힘차게 옆 사람과 포옹을 하지만... 결코 뒤돌아 서지는 않더군요.



결과는 잉글랜드의 승부차기 패배.
2년전... 유로 2004에서 포루투갈과 2대2 무승부 후에 승부차기 패를 당했는데
그 상황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주저앉기 시작하는 잉글랜드 선수들



경기내내 환하게 웃던 아저씨도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합니다.



눈물 흘리는 여자친구를 꼭 안아주는 모습.


패배의 순간은 꽤 오래 갔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잉글랜드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미 퇴장한 관중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잉글랜드 팬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여전히 스탠드에 남아 있었습니다.

주장 베컴이 선수들을 다독거리고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던 선수들이 다시 일어서더니...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면서 그들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던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이겼더라면 겅중겅중 뛰면서 돌았겠지만
패배를 한 후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그들이 경기장을 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자기들을 지지해준 팬들에게
오랜 시간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면서 인사를 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장 아름답게 퇴장하는 선수들
그리고 그들과 항상 함께하는 팬들.
그런 그들 사이의 믿음!




스위스와의 그룹예선 마지막 경기가 문득 떠오르더군요.
정말 열심히 싸웠음에도...
패배한 것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라커로 들어가던 우리 선수들...

우리 선수들도... 비록 패배를 했더라도
팬들에게 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수와 팬이 모두 함께 싸웠고, 우리가 함께 진 경기였으니까요.

.............

저의 이번 월드컵 원정은 이 경기가 마지막입니다.
우용이네 팀도 이 경기를 마친 후에는 독일을 떠날 예정입니다.
정훈이는 아직 몇 장의 티켓이 남아있긴 하지만
잉글랜드가 패하면서 정훈이의 축제도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인철이형은 영국으로 갔습니다.
영국에서 영국 사람들과 잉글랜드 경기를 볼 생각이었는데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기차로 영국에 가게 되었지요.
(아주... 제대로 기차여행 하누만!)

서로 다른 길을 거쳐서 독일에 왔고
또 때론 각자 흩어져서 자기들의 일정을 보냈지만
우리나라의 경기를 포함해서 몇몇 다른 나라의 경기를 함께 보면서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겔센키르셴에서 잉글랜드와 포루투갈의 경기가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의 마지막 단관입니다!


...............

돌아오는 길...
비록 지긴 했지만 잉글랜드 아저씨들은 전철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릅니다.
보아하니... 동네에서 같이 온 불알 친구들 같습니다. ^^

아저씨들이 부르던 노래중에...

"암스텔담, 암스텔담, 암스텔담...."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축구장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의 가락있입니다.)

암스텔담은 홍등가가 아주 유명한 곳이죠?
남자들끼리... 경기 마치고 거기 가자는 식으로 종종 부른다고 하네요 ^^


다시 에센으로 돌아오는 기차역.
어떤 놈은 완전히 술에 쩔어서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똥꼬가 거의 다 나올 판이 되어서 돌아다닙니다.


그런가 하면...
그 무리들 틈에서도 어떤 얍실한 쉬끼는 빈 컵을 수거하고 다닙니다.
(이 컵 하나에 1유로씩 환불해줍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그냥 컵을 팽개쳐 버리곤 하지요.)


그래도...
에센으로 돌아가는 기차길이 즐겁도록
플랫폼에 등장한 미녀 삼총사가 우리를 미소짓게 만들어 줍니다!


.....

지금 프랑크푸르트 공항입니다.
좀 있다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못다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술 한잔 하면서 나누죠 ^^

나 이제 집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