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시인 천상병을 추모하며...

2006. 2. 23. 16:16사는게 뭐길래/볼거리먹거리놀거리

대학시절, 무심코 잡아든 시 한편에서 천상병이란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어떤 사건으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몰랐습니다.

술 한잔, 담배 한 모금, 그리고 시 한편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을
힘있는 자들이 그 힘을 더 오래 지키기 위해서
싸디 싼 막걸리 한 잔, 담배 한 모금 맛나게 즐길 정신을 핍박하고
육체와 이성을 파괴하려 한 짓거리에 분노가 치밉니다.

자유로운 시인은 그런 세상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런 세상도 아름다웠을까...
그의 시가 아름답고, 시 속에서도 세상을 아름답다고 했지만
정말 아름다웠을까...
세상이 아름답다는 시인의 말은
더럽게 고생스러웠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아파서... 오히려 그 끝에는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강 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날 개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날개를 안 다셨는지 모르겠다.

내같이 가난한 놈은
여행이라고는 신혼여행뿐인데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 성취다.

하나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막걸리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운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새소리

새는 언제나 명랑하고 즐겁다
하늘 밑이 새의 나라고
어디서나 거리낌없다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를
울음소리일지 모른다고
어떤 시인이 했는데, 얼빠진 말이다.

새의 지저귐은
삶의 환희요 기쁨이다.
우리도 아무쪼록 새처럼
명랑하고 즐거워하자!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이다.
그 소리를 괴로움으로 듣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놈이냐.

하늘 아래가 자유롭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새는
아랫도리 인간을 불쌍히 보고
아리랑 아리랑 하고 부를지 모른다.




가도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가도 無人之境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나 무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오 후

그날을 위하여
오후는
아무 소리도 없이......

귀를 기울이면
그래도
나는 나의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있다.

멀리 가까이
떠도는 하늘에
슬픔은 갈매기처럼
날아가곤 날아가곤 한다.

그것은
그 어느날의 일이었단다.
그 어느날의 일이었단다.

그리하여
고요한 오후는
물과 같이 나에게로 와서
나를 울리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면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약 속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톳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회 상

그 길을 다시 가면
봄이 오고

고개를 넘으면
여름빛 쬐인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을이 낙엽 흩날리게 하고

겨울은 별수없이
함박눈 쏟아진다.

내가 네게 쓴
사랑의 편지

그 사랑의 글자에는
그러한 뜻이, 큰 강물 되어 도도히 흐른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이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마리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마리새